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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Oct 12. 2024

옛님, 은근히 불편한 당신

 사람들이 꾸려나가는 곳인 만큼, 여기도 가-끔 불청객이 찾아온다. 1년 전이었던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 일요일이었다. 야학으로 전화가 왔는데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저는 20년 전에 야학에서 봉사활동 했던 선생님인데요. 지금 야학 앞에 왔는데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이랑 왔거든요. 그런데 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네요. 도어락 비밀번호가 뭐예요?"


 일요일에 아무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다니. 그것도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 아무리 OB멤버라지만 어락 비밀번호를 가르쳐 줄 순 없는 노릇. 가장 집이 야학과 가까운 선생님이 직접 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전 교사와 학생들은 예전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는지 생님은 교탁에서 분필을 잡고 수업을 하는 시늉을 했고, 학생들은 그걸 재밌게 들었다. 예전 교사와 학생은 감격에 겨운 순간이었겠으나, 난데없이 야학에 소환되어 비 맞은 생쥐가 된 현직 교사는 그 광경이 황당할 뿐이었다. 그저 경우 없는 사람들로 보일 뿐. 불쑥 남의 집에 허락 없이 찾아오는 것, 들어와서 내 것이 아닌 걸 만지는 것도.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생각하지 못할까. 그 뒤로도 이 예전 선생님에게 카톡이 왔다. '야학에 가보니, 이런 점이 아쉬웠다. 개선되었으면 좋겠다', '홈커밍데이가 생겼으면 좋겠다. 술자리 한번 마련해 달라' 등이었다.  예전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경력이 오래된 야학 선생님들께 수소문했으나,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뜨뜻미지근하게 몇 번 대꾸했더니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황당했다. 아무리 본인이 예전 멤버였다고 해도, 오랫동안 떠나 있던 공간을 제 집 드나들듯 온다는 게 무례하다 생각했다. 사실 더 선을 넘어오면 그를 단호하게 대할 참이었다. 그도 나름 선의로 야학 활동을 했을 텐데, 왜 럴까.




 얼마 전에 창고 대청소를 했다. 긴 시간 동안 처박아둔 각종 고물들이 창고에서 튀어나왔다. 나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전기난로, 먼지가 자욱이 쌓인 태극기, 뜬금없이 등장한 판사봉(이건 대체 왜 산 걸까). 그리고 날 갈등에 빠트린 예전 문서들(90년대 야학 문집, 예산사용 장부 등). 내가 이 야학에 온 지 3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이 고문헌! 들을 펼쳐본 적이 없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종이에서 곰팡이 냄새가 스며 나온다. 고민된다. 이 참에 버려야 하나, 야학의 역사이니 다시 창고에 처박아야 하나. 그러다 내 눈에 들어온 15년 전 야학의 게시물.


 과거에 우리 야학 게시판에 붙어있던 홍보물이다. 1989년 우리 야학 1호 학생은 당시 1970년 생이었다. 그러니까 막 스무 살이 된 꽃다운 아가씨. 또 다른 입학원서는 지원동기가 자세하게 적혀있었다. 그녀들의 지원동기를 읽다 보니,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이 흥미로웠다. 동시에 애잔함이 들었다. 현재의 나보다 훨씬 어렸던 그녀들이 겪었던 삶의 고단함이 느껴져서.


지원일 : 1992년 6월 8일

생년월일 : 72년 1월 26일(음력)

집주소 : 동대문구 답십리

직장주소 : 동대문구 답십리

주거상황 : 회사 기숙사

출신학교 : 벌교 남국민학교

가족관계 :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 둘 그리고 나(여섯)

야학에 오게 된 동기

 라디오 양희은의 가요응접실을 들었는데, '돌을 정상에 올려놓기 위하여 끝없이 노력한다'라는 언어에 마음이 들어. 그리고 야학 전화번호를 단번에 외웠다는 인연으로

야학에 하고 싶은 말

 안녕하세요.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벌써 6월 17일 오늘로써 우리가 만난 지도 10일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 벌써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단 내가 여러분께 표현과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할 뿐이에요. 부족한 나지만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사랑해요.



 일면식도 없는 분들의 지원서를 읽는데, 괜스레 마음이 몽글거린다. 영락없는 소녀의 말투. 어린 나이에 타지에서 돈을 벌던 이 K-장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우리 야학이 그녀의 인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까.


 30년 전 학생들의 지원서를 보면서 마음속에 있던 한 가지 의문이 해소됐다. 학생을 부르는 호칭 문제였다. 지금은 학생들에게 '어머님'이라는 호칭을 쓰지만, 내가 처음 야학 봉사활동을 시작했던 13년 전에는 학생을 '~씨'라고 부르는 게 규칙이었다. 대부분 학생들이 나보다 20살 이상 많았는데,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OO 씨'라고 칭하는 풍경이 어색했다. 속으로는 이상한 풍습이라고 여겼지만, 괜히 모난 돌이 되기 싫어서 나도 그렇게 호칭을 쓰긴 했다. 그래도 속으로는 영 미덥지 않은 게 있었다. 그런데 예전 학생들의 지원서를 보면서 깨달았다. 지금과 달리, 90년대에는 학생들이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소녀들이었다. 즉, 대부분의 학생들이 선생님의 '여동생'뻘이었던 것이다. 자칫 선생님들이 편한 감정으로 학생들에게 반말을 쓰는 걸 방지하기 위해, 호칭을 정했을 거다. 그 호칭이 2010년대까지 이어졌던 것.




 비 오는 날 찾아왔던 옛 선생님과 90년대 학생의 지원서를 보면서 느낀 바가 있다. 내가 옛님에게 기분이 나빴던 건, 내가 그와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어서다. 나는 과거 사람들이 겪어온 삶의 맥락을 모르고 결과만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때문에 옛님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다. 어쩌면 내가 만든 선의의 풍습도 미래에는 악습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야학은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더 이상 배움의 한이 있는 학생들이 태어나지 않고 있으니깐. 야학의 문을 닫기 싫다면 학생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소녀들이 오던 곳에, 지금은 엄마들이 오는 것처럼. 아마도 10년 후에는 학교 밖 청소년이나 다문화 여성들이 미래 야학의 학생이 될 것이다. (이미 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은 꽤 존재한다. 그리고 올해 우리 야학에는 첫 다문화 학생이 입학했다.) 미래 야학 선생님들은 아마 날 욕할 수도 있다. 왜 이렇게 글씨가 큰 교재를 사용하는지, 또는 수업 내용이 인종차별적이라는 이유에서. 마치 내가 OB를 이해하지 못하듯. 그러니깐 이제는 옛님들이 기이한 행동을 하더라도 미워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그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화를 낼 필요가 없다. 단지 그에게는 그게 상식일 뿐. 나는 그저 정중하게 내 방식으로 그들을 대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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