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30대의 절반을 야학과 함께 보낸 나도 신입 시절이 있었다. 야학 전화번호를 누르고, 핸드폰 통화버튼을 누를지 말지 몇 번을 고민하던 그 시절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습니다. 평소 생각은 있으나 망설이셨다면 바로 지금입니다^^'
내 마음을 들썩이게 만든 야학 홍보 문구였다. 그날따라 망설이지 말고 지금 실행에 옮겨라는 말이 더 와닿았나 보다. 사실 홍보글을 처음 본 건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대학생 커뮤니티에는 여러 야학 홍보글이 종종 올라왔다. 네댓 개의 야학에서 매달 교사 모집글을 올렸다. 매일 가던 커뮤니티에 홍보글을 보다 보니, 자연스레 관심이 갔다. 구인글을 보자마자 '아! 이게 내 길이야!'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그저 흘려보다가,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호기심이 스며들었다. 늘 먹던 밥이 유난히 맛있는 날이 있다. 항상 만나는 친구인데 이상하게 더 좋은 날도 있고. 그날은 매번 보던 이 홍보문구가 가슴 깊이 박혀 들어왔다. 지금이 아니면 또 미룰 것이라는 불안감과 함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야학에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모교와 인근에 있던 금정야학, 사상구에서 큰 규모를 자랑하던 샛별야학 등. 그중에서 난 동구 수정동에 있는 참사랑야학을 택했다. 예전부터 그 동네를 좋아했다. 인근에 있는 수정시장은 사람 구경하기 좋고, 정감 가는 노포가 많았다. (나중에 느꼈는데, 야학은 보통 구도심에 있기 때문에 동네가 다 그런 분위기이긴 하다.)
야학의 문을 두드리기 전에는 이런저런 고민이 있었으나, 홍보 연락처로 전화를 한 뒤에는 오히려 잡념이 사라졌다. 활동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상담 선생님이 나에게 원했던 건 두 가지였다. 1년 이상 활동할 것, 매주 1회 수업을 꼬박꼬박 지킬 것(가끔 수업 변경은 가능). 아직 3학년이니깐 취업준비 전까지 활동한다면 최소 1년 반은 활동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내 예상과 달리 책임감과 성실성이 중요했다. 상담을 하기 전에는 내 부족한 수업역량, 수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 때문에 거절을 당할까 봐 걱정도 했었다. 그저 성실하기만 하면 된다니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참사랑야학. 지금 보니깐 엄청 오래됐구나.
처음으로 참사랑야학에 발을 디뎠다. 이미 밖은 어두컴컴한데, 야학 안은 형광등 덕분에 환했다. 학교 곳곳에는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꼬깃꼬깃한 교과서, 누렇게 바랜 복사기, 나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서재. 학교라고 해봤자 소규모 사무실 하나 크기다. 교사 대기공간과 교실 두 개. 전체 면적을 다 합해도 10평 남짓이다. 교실은 가벽으로 나눴다. 졸업식 같은 행사 때면 이 가벽을 떼어내서, 큰 홀을 만들어낸다. 칠판지우개는 아껴 쓰려고 휴지를 덧대서 사용 중이었다. 작고 낡은 그 공간이 주는 느낌이 좋았다. 그냥 낡음이 아닌,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티가 났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 마냥 긴 역사동안 이곳을 지켜왔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공부를 하기에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환경이었다. 오히려 역경을 이겨냈다는 서사를 가지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도리어 너무 쾌적하면 서운하지.
이날 나는 선배 선생님들의 수업 2개를 참관했다. 내 또래 남자 선생님의 영어 수업, 여자 선생님의 국어 수업이었다. 참사랑야학은 대부분 같은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하고 있었다. 두 선생님 모두 차분한 말투로 학생들에게 공부를 설명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나긋한데도 졸리지가 않았다. 학생들이 집중해서 수업에 임했기 때문이다. 열중하는 그 모습을 보니, 마치 그녀들의 몸에서 아우라가 나오는 것 같았다. 사소한 설명에도 대답을 꼬박꼬박 하는 모습도 신기했다. 10대 청소년에게 과외할 때는 보통 시큰둥한 표정을 봐야 했다. 반면 야학 학생들은 수업에 호기심을 가지고 듣고 있었다. 참관하는 나도 덩달아 수업에 몰입한다. 크게 숨을 쉬기도 눈치가 보였다. 수업 참관 후에는 선생님들께 감상문을 제출해야 하는데, '수업 잘 들었습니다. 정말 잘하시네요'라고 밖에 쓰지 못했다. 그 이상 내가 그분들을 평가할 깜냥이 되지 못했다.
참관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11시가 다되어 가는 시간. 문을 닫아 고요해진 시장길을 걸어가던 그때가 생생하다. 걱정과 설렘이 공존한다. 최소한 1년은 해야 한다던데, 이번학기에는 전공수업이 힘든데 매주 꼬박꼬박 봉사활동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 그리고 이곳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설렘. 참관을 마치고 선배 선생님이 귀여운 텃세를 부렸다. '그래도 야학 활동 좀 했다고 어디 가서 말하려면 2년은 해야죠'라는 으스댐이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봉사자였는데, 그럼 이 분은 대학을 입학하자마자부터 활동을 시작했나 보다. 똘똘해 보이는 그녀에게 거리감이 확 생겼다. 아마 그때 나도, 그녀도 몰랐을 거다. 2024년까지 내가 야학의 문을 열고 있을 거란 걸. 이제 내가 그녀보다 훨씬 경력이 길다.
야학에 첫걸음 했던 게 어느덧 13년 전이다. 취업을 하면서 자연스레 야학을 그만뒀지만, 서울로 거처를 옮긴 뒤에 다시 분필을 든 지도 3년이 넘었다. 1년쯤은 누구나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세월이 7년쯤 되니, 단지 '그냥'이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왜 야학을 지금까지 가고 있나. 시간이 많아서? 봉사심이 투철해서? 아니다. 시간이 많아야 할 수 있다면, 내가 함께 봉사활동하기를 권유했던 내 친구들이 모두 함께 했어야 한다. 봉사심이 필요하다면 야학보다 더 손길이 간절한 기관에 가야 했다.
나는 원래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라서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비단 야학이 아니었어도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인' 어떤 곳에 가있었을 것이다. 그래야 직성이 풀리니까. 그런 모습을 보는 걸,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 하니까. 낮에는 일터에서 일하고, 밤에는 졸린 눈을 비벼가며 공부를 하는 만학도들의 모습은 언제 봐도 존경스럽다. 그들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도 다짐한다. 저들만큼 열심히 살겠다고. 환경탓 하지 말고 후회 없을 만큼 살아보겠다고. 이따금 매너리즘에 빠질 때면 그간 내가 만나왔던 야학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러면 다시 힘을 낼 기운 한 움큼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