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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Sep 03. 2024

편견 때문에 놓칠뻔한 인재들

 내 감을 확신했다면 선생님 J를 선발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에게 연락한 건 교무선생님의 권유 때문이었다. 반년쯤 전에 선생님 J로부터 지원문의가 왔었고, 교무 선생님과 전화 통화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바로 활동을 시작했어야 했는데, 그녀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는 바람에 봉사활동이 무기한 연기됐었다. 이제 교사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컨디션이 올라와서 다시 문의가 온 것이었다.


 그녀와 전화상담을 했을 때 그녀의 대답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첫째, 예전부터 야학에서 봉사활동 해보는 게 자신의 로망이었다는 것. 유퀴즈에 우리 야학 선생님이 출연하신 걸 보고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남들이 들으면 '예전부터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이니 당연히 좋은 사람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몇몇 빌런 선생님들을 겪으면서 쌓인 내 빅데이터가 있다. 첫 만남 때부터 로망, 꿈을 들먹이는 사람은 지구력이 약하다는 것. 좋게 말한다면 심성이 고운 거지만, 낭만에 너무 취해있으면 될 것도 안 되는 것. 이 사람도 초반에 열정적으로 하다가, 금세 지쳐서 나가떨어지지 않을지 걱정이 됐다. 더구나 방송에서는 좋은 얘기만 나왔는데, 막상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항상 행복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밥벌이라면 힘들어도 참고 견디겠지만, 언제든 잠수를 타버려도 손해 볼 것 없는 봉사활동은 다르다. 어려움을 만났을 때 과연 이 분이 헤쳐갈 수 있을까. 회의적이었다. 집이 너무 먼 것도 걱정이었다.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 자차로 꼬박 80분 거리에 있는 곳에서 매주 방문하겠다고? 처음에야 재밌으니깐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몇 달 후라면? 새로움이 사라진다면? 그때도 먼 길을 달려올 수 있을까? 늦은 밤 귀가는 또 어떻고. 실제로 거리가 너무 먼 지원자에게는 '가까운 다른 야학이 있는데 이 쪽으로 가는 건 어떠실까요?'라고 돌려보낸 적도 있다.




 선생님 J가 초등 수학 수업을 맡은 지 석 달쯤 지났었나. 그녀가 처음으로 야학에 의견을 냈다. 학생들의 신경전에 관한 건이었다. 대놓고 싸운 건 아니지만 혜원 씨와 예은 씨가 사이가 냉랭하다는 것이 그녀의 우려였다. 나도 그 두 분의 성격이 그다지 맞지 않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급우들끼리 무조건 친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애들도 아니고 다 큰 성인들인데, 억지로 사이를 붙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지만 수학 선생님이 바라본 상황은 내 인식과는 달랐다.


 "혜원 씨는 개미고, 예은 씨는 배짱이예요. 두 분 다 스트레스가 크세요. 혜원 씨는 그날 배운 거를 그날 돌아가서 바로 복습할 정도로 열심히 하세요. 예은 씨는 쉬엄쉬엄 무리하지 않고 배우는 스타일이에요. 혜원 씨는 열심히 하지 않는 예은 씨가 답답해요. 반면에 예은 씨는 혜원 씨가 오지랖이 넓고, 유난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러면서 선생님 J는 학생들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구체적으로 다른 선생님들께 알려주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감지할 수 없는 미묘한 관계를 잡아내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 둘의 갈등을 봉합한 것도 선생님 J였다.


 "두 분 다 수학수업을 듣기 싫어했어요. 수학 설명을 듣다 보면 머리가 멍해지고, 두통이 온다고 하셨어요. 수학이 실생활과 연관도 없어 보이니까, 가뜩이나 어려운데 왜 배우는 지도 모르겠다고 하시고요."


 멍 때림과 두통은 매년 발견되는 증상이다. 어쩜 수학을 싫어하는 분들의 겪는 현상이 이렇게 매번 같은지. 이 증상이 생기는 분들은 보통 수포자(수학 포기자)가 되거나, 공부를 중도하차하기도 한다. 나는 매년 이런 분들을 만나다 보니,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새로 오신 선생님은 달랐다.


 "학생들이 너무 힘들어하길래, 한동안은 그냥 수업시간에 놀았어요. 어떤 날은 그냥 사는 얘기만 하다가 끝내기도 하고. 한 문제만 같이 풀고 끝낸 날도 있고요. 개그콘서트를 하는 것 마냥 만담을 주고받으면서 친해지려고 했어요."


  그러고 보니 수학선생님은 학생들의 개인 사정에 대해 나보다 많이 알고 있었다. 학생들의 자식들이 어디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까지 이미 꿰고 있었다. 감정이 북받쳤는지 말을 잇는 그녀의 숨이 가빠졌다.


 "하나를 알려드리더라도, 단순한 지식을 넘어서 수학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말하려고 했어요. 수학을 배우는 이유를 깨우쳐 드리려고 노력했. 원은 보통 동그라미라고 생각하잖아요. '실 끝에 연필을 달아서 뺑 돌리면 그게 원이다. 중심에서 거리가 같은 점들의 모임이다.'라고 직접 그려보면서 알려드리면 신기해하시거든요. 그렇게 한 걸음씩 수학의 정의를 중점적으로 공부하다 보니까 조금씩 재미를 붙이시더라고요. 현실과 그리 동떨어지지 않았다고 느끼시고요. 어쩌다 보니 두 분 사이도 예전보다 좋아지셨어요. 같이 고난을 넘어서 그럴 걸까요? 서로 친하진 않아도, 미운 정은 생긴 거 같아요.(웃음)"


 자신의 성공담을 얘기하는 그녀는 감정이 벅차보였다. 학생의 성장을 바라보는 뿌듯함이 눈에 담겨 있었다. 원래 수학은 우리 학생들이 가장 많이 포기하는 과목이다. 그런 수학을 '멱살 잡고 끌고 간' 선생님 J였다. 그녀보다 열 배는 오래 수업한 나도 해내지 못 일을 그녀가 해냈다. 내가 수학 수업할 때는 동기부여 방법이 그저 '여러분, 수학 공부하면 머리 아프시죠? 그래야 치매 예방이 돼요.' 정도인데. 고운 심성을 가진 그녀가 아니었으면 해결하지 못했을 일이다. '그녀가 말했던 '로망'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나는 그녀의 남다른 감수성 때문에 적응을 못할까 봐 걱정했지만, 도리어 그 점 덕분에 아무도 해결 못하던 골칫거리를 해결했다. 


 만약 내가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진가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지원서가 있었는데, 싸해서 다른 사람 뽑았어.'라고 한마디 하고 그냥 잊혀 갔겠지. '느낌이 싸하다'는 이유로 넘겨버린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이 혹시 또 있진 않았을까. 내 촉은 똥촉다.




 연애 관련 인플루언서가 SNS에 남긴 소개팅 금기사항이 있다. '남자들은 제발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애니메이션 캐릭터 좀 해놓지 마라. 특히 슬램덩크와 원피스! 여기에 덧붙여 메시, 호날두, 손흥민도 금지다.' 오... 수긍이 갔다. 내 주변에서 위 종류의 프로필 사진을 해 둔 사람 몇 명이 떠올랐는데, 소개팅을 못 시켜줄 것 같은... 뭐 그런...^^;


 새로 오신 선생님 K이 그랬다. 이 분은 삼종 세트를 갖추었다. 프로필 사진은 원피스 루피, 소개 메시지는 누군가가 말한 명언 같은 거, 그리고 닉네임은 무의미한 알파벳 조합. 성격이 특이하거나,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 본인의 정체를 숨겨야 하는(=켕기는) 상황이거나, 사회성이 부족하거나? 설마 이분도 빌런?! 가뜩이나 말도 달변가처럼 잘하던 분이라 초반에는 경계를 다. 몇 달 뒤, 멀쩡한 사람인 것 같아 마음을 놓고는 원피스 사진에 대한 내 생각을 조심스럽게 전달드렸다. 그에게는 루피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는 숨은 이유가 있었다.


 "제가 예전에는 우리 아이랑 같이 찍은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해뒀거든요. 제가 다니는 회사 주가가 떨어질 때, 사람들이 네이버 주식 토론방에서 제 프로필 사진을 가지고 조리돌림 하는 거예요. 일은 안 하고 가족들이랑 롤러나 다닌다고요. 가족 얼굴까지 팔리는 걸 보고서는, 카카오톡 사진을 그냥 캐릭터로 바꿔버렸어요."


 사진 한 장으로 사람을 속단해 버린 내 판단력이 부끄러웠다. 어쩌면 '싸함'은 나와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닐까. 싸이언스는 위험한 상황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어막이 되지만, 가끔은 '좋은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 두려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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