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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Aug 23. 2023

파타고니아에서 만난 행복의 역치

엘 찰텐,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여행의 목적은 단연 파타고니아였다. 청정의 자연. 한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광활한 대지. 이걸 보러 지구 정반대인 이곳까지 왔다. 파타고니아의 백미는 단연 피츠로이다. 의류 브랜드 파타고니아 마크가 바로 이 피츠로이 봉우리를 따왔다.



 한국에서 피츠로이까지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지구 반대편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당도한 다음, 국내선으로 엘 칼라파테로 이동한다. 그리고 버스로 4시간을 달려야 준비기지인 엘 찰텐 마을에 도착한다. 이동으로만 꼬박 사흘이 걸린다.


 시간 아깝고, 힘들고. 그런데 이 짓을 왜 하냐고? 와보면 안다. 고진감래다. 아르헨티나가 치안이 안 좋다지만 엘 찰텐은 예외다. 관광마을이라 부랑자가 없다. 천사의 마을이라고도 한다. 관광객 바가지는 존재한다.


푸...푸마가 나온다고?!


 피츠로이에서 가장 유명한 등산코스는 '라구나 토레스'다. 편도 10km가량인 이 구간은 사람을 낚는 것으로 유명하다. 8km 지점까지는 완만하게 능선이 이어져서 사람에게 용기를 주다가, 마지막 2km에서 지옥을 보여준다. 8km를 걷는 동안 체력이 방전됐음에도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되어 그걸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마지막 구간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깎아진 듯한 오르막. 여기서 넘어지면 죽을 것 같다. 아찔하다. 너무 자존심이 상한 건 내가 눈 쌓인 바닥에 미끄러질 뻔할 때마다 백발의 할아버지들이 놀린다는 거다. 아오 저 등산 고인 물들. 나는 운동화를 신고 갔는데, 꼭 등산화 신고가라 제발. 정상에 서면 그 고생이 모두 보상된다. 본 적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포기하지 않고 이곳까지 오길 잘했다.



 피츠로이로부터 고단함과 뿌듯함을 가득 안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4인실 에 또래 한국인이 있었다. 여기는 한국 여행객, 그것도 호스텔을 이용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우연일 리는 없고, 아마도 호스텔 스탭이 같은 국적이라고 한 방에 넣어줬나 보다.


 그 한국 여행객 H형은 장간 해외에서 일하다가 모처럼 긴 휴식을 즐기는 중이었다. 한 달간 아르헨티나 여행을 하고 돌아갈 계획이라고 했다. H형과 나는 호스텔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나는 그날 라구나 토레스를 완주한 것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경치가 어쩌고, 중간부터는 너무 힘든데. 물은 너무 맑아서 그냥 마셔도 된다는 둥. 사람들은 또 너무 친절하다 등등. H형은 아이를 쳐다보는 부모처럼 날 쳐다봤다. 알고 보니 그는 등산 고인 물이었다. 머쓱했다. 나는 당일치기로 주요 스폿만 다녀왔는데, 그는 내일부터 3박 4일간 산맥을 타면서 파타고니아를 즐길 예정이라 했다. 심지어 로프도 준비했더라. 길이 없는 구간은 줄을 타고 이동한다고. 배낭에 텐트와 음식을 이고 그 산을 탄다고? 경이로운 사람이다.

 이 동영상을 보여줬다. 보통은 우와 멋지다가 나와야 하는데 이 형은 '다행이네요. 아직 눈이 안 녹았어요'라고 대답했다. 역시 내공이 다르다. 그에게는 동네 마실 수준의 코스를 내가 떠벌리며 자랑했다는 사실이 좀 부끄러웠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나는 트래킹 초보인데. 그리고 나는 오늘하루 충분히 즐거웠다.


 H형은 이렇게 말했다.


 "부러워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어서"


 빈말이 아닌 것 같았다. 의외였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겨우 그거 가지고 우쭐대냐? 야 난 어릴 적에 어쩌고 저쩌고'라고 날 깔아뭉개야 하는데. 심지어 부럽다니. 그의 말은 이랬다. 자신은 워낙에 등산을 많이 하다 보니, 이제 웬만한 산에는 감흥이 없단다. 그래서 초보자인 내가 느끼는 감동이 부럽다는 거다.


 생각해 보니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처음 해외여행을 가는 친구와 도쿄에 간 적이 있다. 나는 이미 여러 번 와본 도쿄라 익숙했는데, 그 친구는 일본의 모든 것에 새로워했다. 도시 구석구석을 사진을 찍는 친구의 모습이 신기했다. 그에게는 신호등, 주차된 자전거, 평범한 건물까지도 남기고 싶은 피사체였다. 생각해 보니 나도 첫 해외여행은 그랬다. 첫 경험의 행복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많이 해 본 것만이, 높은 곳을 가야만 행복한 건 아니다. 역치가 낮은 게 더 좋을 수도 있다.


 그 형의 말이 여행이 끝나고도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족에 대해,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다. 꼭 큰 업적을 이뤄야, 비싼 걸 가져야 행복한 건가. 그러고 보니 요즘은 근처에 있는 나라는 여행을 잘 가려고 하지 않는다. 한국과 비슷해서다. 이렇게 자극만 쫓다 보면 점점 더 힘든 걸 갈구하게 되겠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자극에서 나오는 도파민보다, 일상적인 것에서도 만족을 찾을 수 있는 세로토닌이 더 필요한 건 아닐까. 내가 가진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지혜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가장 먼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대한 숙제를 얻었다.



다른 아르헨티나 여행기도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1be434e664e749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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