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룰루 Dec 15. 2022

프랑스 헌 옷 가게, 건질 게 있을까?

파리, 프랑스

 나의 옷 취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패션 유튜버 짱구 대디고, 다른 한 명은 오늘 얘기할 그녀다. 짱구 대디는 유튜브로만 접했을 뿐 실제 만난 적은 없고, 만난 적 있는 사람 중에서는 그녀가 가장 많이 내게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파리 여행  묵었던 숙소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내가 가기 며칠 전부터 이미 민박집에 머무르던 게스트였다. 나이를 묻진 않았지만, 아마 우리 부모님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았을 거다. 그녀는 유쾌하고, 자신의 경험에서 나오는 확고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신이 는 이야기 주제가 나오면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씩 풀었는데 주위 사람들이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녀는 패션과 관련된 사업을 한다고 했다. 나에게 패션은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관심은 있지만 어떤 옷이 좋은 옷인지, 나에게 어울리는 옷인지 몰랐다. 그런데 이렇게 파리에서 전문가를 만났다고? 이건 절호의 기회다.


 "선생님, 그럼 내일 저 옷 사러 같이 가실래요? 옷 좀 골라주세요." (나는 그녀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래. 그런데 난 옷을 정가에는 안 사. 세일할 때 사지."


 다음 날, 그녀와 옷가게를 찾아 나섰다. 거리를 걷다가 그녀의 눈에 띈 가게는 구제 샵이었다. 구제 샵? 중고 옷가게에서 쇼핑을 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정가에 안 산다더니 중고의류를 살 줄이야. 여태껏 단 한 번도 구제 샵에서 옷을 사본적이 없었다.


 파리에서 만난 구제 옷집은 쇼핑하기에 나쁘지 않았다. 명품 매장처럼 Fancy 하진 않지만, 너저분하지 않은 선에서 정돈되어 있었다. 옷마다 클립이 달려있는데, 클립의 색깔에 따라 가격이 정해졌다. 초록색 클립은 5유로, 파란색 클립은 10유로 이런 식이다. 심지어 어떤 품목은 옷을 무게 단위로 판매 중이었다.


https://www.google.com/maps/@48.8581505,2.3520971,17z


사진출처 : Kilo shop 페이스북


 이 거대한 창고에 옷이 참 많고, 다양하고, 저렴하다. 그러나 내가 안목이 없 문제다. 구제 샵 옷의 질은 천차만별이다. 잘 고르면 득템이지만, 못 고른다면 쓰레기를 돈 주고 사 오는 것이다.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가게를 둘러본다. 가끔 옷을 꺼내서 나에게 쓱 대보고 고개를 다시 집어넣는 것을 반복했다. 내가 옷을 골라서 "이거 어때요? 괜찮나요?" 물어보면 그녀는 건조하게 "그런 거적때기는 당장 다시 갖다 놔"라고 답했다. '그녀의 회사에는 절대 입사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녀의 눈을 사로잡은 옷은 초록색 체크무늬 셔츠였다. 엥. 초록색이라니 너무 튀는 거 아닌가. 그리고 난 평소에 100 사이즈를 입는데 이 옷은 110은 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확신에 차있었다.


 "이 옷이 자기한테 어울려. 자기가 몸에 딱 맞는 옷만 입어봐서 어색한가 본데, 오버핏으로 입는 것도 멋스러운 거 알아? 일단 한 번 입어봐. 이 셔츠는 자기가 앞으로 10년을 입을 수 있는 셔츠야."


 그녀의 강권 때문인가. 크게 입는 옷이 좀 어색했지만 묘하게 매력이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옷을 크게 입어본 적이 없는데. 무심하게 툭 걸친 셔츠가 이색적인데 나쁘지가 않다. 가격도 싼데, 속는 셈 치고 사보자. 그리고 그녀의 추천으로 페도라 모자도 충동적으로 구입했다. 한국에서 절대 쓰지 않음을 직감했지만, 제발 이 모자를 사서 파리에서 썼으면 하는 그녀의 바람을 외면할 수 없었다(내 넉넉한 머리를 집어넣기엔 모자 사이즈가 턱없이 작았음에도). 그렇게 셔츠와 모자를 구입하고 그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이제야 좀 파리지앵 같네."


 그녀는 흡족하다는 말투로 한마디 내뱉었다. 그날 난 파리지앵 코스프레를 하고 그녀와 함께 퐁피두 센터를 관람했다.


 그날 저녁, 그녀는 나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


 "자기는 예술가의 느낌이 있어. 그래서 예술가들이 입을 만한 옷이 잘 어울려. 오늘처럼 자기 몸보다 훨씬 큰 옷을 입는 것도 방법이지. 그리고 셔츠를 사더라도 레이스가 달린 셔츠 같은 거. 그런 디테일이 있는 옷이 잘 받아."


 이게 뭔 소린가. 레이스 달린 셔츠를 입으라고? 이건 욕이 아닐까. 그녀의 당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났다. 한국의 유행이 변했다. 그녀를 만날 당시에는 몸에 딱 맞게 입는 옷차림이 유행이었으나, 지금은 너도나도 오버핏을 입고 다닌다. 또한 젠더리스 패션이 유행하면서 남자도 미니백을 매고, 진짜로 레이스가 있는 셔츠를 입기도 한다. 최근에는 셔츠를 재킷처럼 활용하는 '셔켓'이란 단어도 사용하고 있다. 지금 와서 보니 그녀의 말은 이상한 말이 아니었다. 당시 내가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일 깜냥이 되지 못했을 뿐.


 그날 구입한 초록 셔츠는 지금도 종종 입고 있다. 특히 여행 갈 때 자주 챙겨간다. 기내에서 방한용으로 입기에 안성맞춤이고, 여행지에서 청바지와 흰 티 위에 걸치면 히피로 변신한다(모자는 고민하지도 않고 버렸다). 그녀가 남긴 건 셔츠뿐만이 아니다. 근자감. 가끔 무난하지 않은 옷을 사기에 망설여질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그래. 그때 선생님이 나 이런 옷이 어울린다고 했어!' 라며 그날의 말을 새긴다. 그리고 구매 버튼을 누른다. 그렇게 지금까지도 그녀의 말이 내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그렇게 내 옷장은 다채로워지고, 지갑은 날씬해져 간다.


 프랑스 구제 숍, 여기에서 건질 옷은 많다. 없는 게 있다면 우리의 안목이겠지.


(좌) :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우) : 태국 스완나품 공항

                     

본 글은 2022.12.15 다음 메인에 게재되었습니다.
이전 07화 파타고니아에서 만난 행복의 역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