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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Jan 04. 2023

장래희망은 '회사의 부품'입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르헨티나

 외국에 있는 한인민박들은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관광명소에 위치하지 않는 대신 접근성이 좋은 역세권 위치에 있으며, 건물은 다소 낡았다. 하지만 사장님이 친절하고, 한식을 먹을 수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일주일 동안 묵었던 한인민박 '부에노까사'도 이 특징들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곳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여행의 중심인 마요광장에서 지하철로 5 정거장 떨어져 있다. 신축 호텔, 호스텔보다는 시설에서 열세지만 한국어가 통하고 매일 아침에는 한식이 제공된다.


 이곳 사장님 부부는 여느 민박집주인들과 달랐다. 뭐랄까. 삶의 내공이 느껴졌다. 아르헨티나 여행과 관련된 정보 외에도 생활 정보에 빠삭하셨다. 대화를 나눠보면 은연중에 그들의 경험에서 나오는 생존지식이 있었다. 소싯적에 사업으로 큰 부를 얻기도 했고,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신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입체적인 삶을 사셨으니, 잠깐 머물다 가는 나 같은 게스트에게도 내공이 느껴지겠지. 코로나 팬데믹으로 다른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민박집들이 버티지 못한 와중에도 유일하게 손님을 받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장님 내외는 게스트들과 소통을 적극적으로 하셨다. 한인민박이 손님들의 평판에 민감하긴 하지만, 이곳 사장님 부부는 필요 이상으로 손님들과 얘기를 나누고 친해지셨다. 되도록이면 게스트들에게 아사도(아르헨티나식 소고기 숯불구이) 파티를 열어주었고, 기분 좋으실 때는 술도 무료로 손님들에게 나눠주었다. 특히 여사장님이 사람을 무척 좋아하는 성격 같았다. 사람을 좋아하면 민박업이 힘들 텐데. 정을 나누더라도 언젠가는 떠날 사람들을 맞이하는 일을 끊임없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친해졌던 게스트가 떠나고 나면 여사장님은 눈물을 쏟으신다고 한다.

건물 전체를 숙소로 활용중이다. 주택가 지역이라 거리는 조용하다.

 이번 여행을 위해 회사에서 2주 연차를 받았다. 별 어려움 없이 2주 동안 자리를 비울 수 있는 회사라니. 좋은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찝찝하기도 하다. 2주간 내가 없어도 회사는 이상이 없다는 말이니깐. 실제로도 그랬다. 내가 없이도 업무공백이 없었다. 전화는 커녕 메신저 질문도 오지 않았다. 유능한 선배들이 나의 빈자리를 너무나도 잘 채웠다. 그러니깐 내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는 것도 쿨하게 허락하셨겠지.


 나 없이도 회사가 잘 굴러간다는 말은, 반대로 말하면 회사는 나를 고용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 쓴 건전지를 교체하듯, 다른 사람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만 가지고 있으니깐. 지금이야 해고되더라도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할 수 있는 나이라서 별 문제는 없다. 하지만 내가 나이가 들었을 때,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한다면 어떡해야 할까. 녹슨 부품은 손을 쓸 방법이 없다.


 이 지경이 된 원인이 무엇일까. 무엇이 모자랐을까. 재능? 기회? 운? 노력? 모두 다?


  하루는 사장님 부부가 피자를 많이 사 오셨다. 나에게 즉석 피자 파티(?) 참가를 제안하셨고, 자연스럽게 식사를 함께하게 되었다. 여사장님은 외국계 회사에 재직 중이라는 사실도 그 자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민박을 운영하면서 회사까지 다니고 있다니. 꽤 중요한 업무를 맡아서 하고 계셨다. 무책임한 일처리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인들을 상대로 일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녀의 무용담, 강한 생활력은 회사에서 존재감이 없는 내 처지와 대비가 되었다.

 

 "사장님, 정말 대단하세요. 저는 회사의 부품으로 살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인데, 사장님은 여러 사람의 몫을 하고 계시네요."


 "직장인이 그렇죠. 부품인 게 걱정이면 이렇게 해봐요. 내가 있는 자리가 삼각 모양이면 사각으로 만들어요. 오각이면 육각, 칠각이면 팔각으로 만들고요. 더 정교하게 그 자리를 깎아봐요. 그렇게 쉽게 대체되지 않는 자리로 만들면 돼요."


 그럴지도 모른다. 부품이라서 문제가 아니다. 그저 아무 곳에서나 사도 되는 부품, 그 정도 수준으로만 동작하는 싸구려 부품이라서 불안할지도 모른다. 정교한 부품이 되어보자. 멀리서 시작하지 말자.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일부터 시작하자.


 "이 나라(아르헨티나)와 한국이 다른 게 뭔지 아세요? 이 나라 사람들은 눈치 보지 않아요. 예를 들면, 한국은 짜장면 가격이 대충 정해져 있잖아요? 그런데 이 나라는 아니에요. 옆집이 5천 원에 음식을 팔아도, 내가 자신 있으면 같은 메뉴라도 5만 원에 팔아요. 그럴 수 있는 가치가 있으니까."


 아침 7시, 사장님이 객실 앞 신발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모습을 우연히 봤다. 그러고 보니 난 방에 들어갈 때 신발을 정리한 적이 없는데도 내 신발이 항상 정리되어 있었다. 이런 티 나지 않는 하나하나가 모여서 사장님이 말씀하신 팔각형의 정교함이 나오는 걸까.


 직업에 대한 고민은 끝도 없고, 답도 없다. 그래도 이 날 들은 조언은 한 가지 대안이 되는 것 같다. 내 미래걱정을 하기 전에 현재 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부터 해보려고 한다. 점점 더 정교한 부품이 되어보려고 한다.


글을 쓰다보니 숙소에서 먹었던 고기가 또 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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