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룰루 Mar 26. 2023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파리, 프랑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마이클 타이슨



 중국 상하이를 경유해서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한국에서 출국할 때, 중국동방항공 카운터 직원은 나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경유하시는 상하이 공항 카운터에서 반드시 짐이 파리까지 가야 한다고 다시 한번 말씀하세요."


 이렇게 항공사 직원이 나에게 당부한 이유가 있었다. 중국 항공사는 경유과정에서 짐이 분실되기로 유명했다. 내 짐도 없어졌다. 난 파리에 도착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내 위탁수화물이 나오지 않았다.


'설마 내 짐이 안 올 리가 없어. 중국 공항 카운터에서 내 짐을 파리에서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확인도 해줬잖아. 기다리면 짐이 나올 거야.'


 30분쯤 기다렸을까. 나 빼고는 모든 파리행 비행기 승객이 짐을 찾아 유유히 공항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실감이 됐다. 앞이 막막했다. 어떻게 여행하지. 옷이며 도구들이며 물건이 하나도 없는데. 게다가 한 시간 뒤면 기차를 타고 스트라스부르로 가야 하는데. 지금 뭘 해야 할까.


 우선 'baggage claim'에 가서 분실신고를 했다. 그리고 고민했다. 파리에서 내 짐이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지, 예약해 둔 기차를 타고 스트라스부르로 가야 할지. 생각해 보니 내가 파리에 있다한들 상황이 호전될 건 없었다. 내가 짐을 가지러 갈 건 아니니깐. 가방이 없는 건 이미 벌어진 일이다. 가방은 가방이고, 여행은 시작해야 했다.


 캐리어 없이 파리에서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기차를 탑승했다. 기차를 탑승하기로 마음을 먹는 과정이 힘들었지, 막상 기차를 탑승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프랑스 여행 시작됐다는 생각 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렇게 짐 없는 여행이 시작됐다.


 여행 전에 여행자보험에 가입해 뒀는데, 보장내역에는 '수화물 분실/지연 시 10만 원 한도에서 실비 보상'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10만 원 한도에서 물건을 사고 보험사에 영수증을 제출하면 돈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세면도구와 속옷, 갈아입을 여벌의 옷을 10만 원 내에서 샀다.


 스트라스부르 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왔는데도 내 짐은 아직 상하이에 있었다. 대체 이것들은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속에서 열불이 났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건 그거고 여행은 여행이다. 화는 잠깐만 내고, 나머지 시간은 여행에 집중하려로 애썼다. 다행히 짐 없이도 여행은 충분히 재밌었다. 나중에는 '짐 그냥 한국으로 바로 보내주면 안 되나? 괜히 가지고 다니기 무겁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10만 원 한도에서 생필품을 살 때면 꼭 옛날 TV 프로그램 '만원의 행복'에 도전하는 느낌도 들었다. 내가 챙겨다닌 것 중 그리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많음을 느꼈다. 약간의 불편함만 감수한다면, 짐 없이 여행도 가능하구나.


 없어진 짐 때문에 내 일정에는 변화가 있었다. 뛸르리 정원에서 낮잠을 잘 시간에 생필품을 사러 마트를 갔다. 하루종일 루브르 박물관에 있고 싶었지만, 공항에 짐을 돌려받으러 뛰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이것도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크게 속상하진 않았다.


 짐이 있었다면 하지 못했을 경험을 했다. 파리 SPA 옷가게에서 당장 입을 청바지와 셔츠를 샀는데, 그 옷이 남들이 보기엔 촌스러웠나 보다. 마침 민박집에서 머물던 한 분이 의류업계 종사자셨는데, 다음날 같이 쇼핑을 하게 되었다. 짐이 없어서 구매한 셔츠가 발단이 되어서. 이런 여행코스는 계획을 할 수가 다. '짐을 잃어버리고, 패션 테러리스트가 되어, 조력자를 만나 쇼핑하기'라는 일정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단지 주어진 상황에 대응하다 보니 별안간 재밌는 여행 코스가 뚝딱 생겨버렸다. (이 에피소드는 이전에 글로 쓴 적이 있으니 궁금하신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


https://brunch.co.kr/@1be434e664e7498/34


 인생에서 계획대로 되는 날이 얼마나 있을까. 플랜 B, 플랜 C, 플랜 Z까지 짠다면 돌발상황 없이 차분하게 계획에 맞게 행동할 수 있을까. 계획대로 된다 한들, 내 계획이 잘못된 전략이었으면 또 그건 어떻고. 그럴싸한 계획이었으나, 처맞아보니 전혀 먹히지 않는 계획이었음을 그때서야 알게 된다면. 계획보다 더 중요한 건 대응이다. 그리고 여행은 닥친 상황에 대응하는 연습을 하기 가장 좋은 환경이고. 적어도 여행만큼은 잘함과 못함이 없으니까. 그러니 여행에서는 무거운 계획을 덜어놓고, 주어지는 상황에 몸을 맡기는 게 어떨까.



Tip.

러시아와 중국 공항에서 위탁 수화물을 분실하는 사례가 많다.

위탁 수화물을 받지 못했을 때는 Baggage Claim으로 찾아가서 신고한다. 

분실 보상금은 보통 수화물의 무게가 기준이다. 보상금은 정말 껌값만큼 돌려받으므로, 귀중품은 위탁하지 말자.

외항사는 CS가 원활하지 않다. 이럴 때는 한국사무소에 전화해서 문의하는 것도 방법이다.(적어도 내 짐이 어떤 상황인지는 알려준다.)

이전 09화 모르는 이성과 단 둘이 유럽 여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