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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Feb 01. 2023

모르는 이성과 단 둘이 유럽 여행

세비야, 스페인

 스페인은 활기차다. 스페인 사람들에게 제일 많이 들었던 단어는 'amigo'(친구)다. 이들은 처음 만난 사람한테도 친근하게 친구라고 부를 만큼 유쾌하다. 특히 세비야는 더욱 그렇다. 대도시인 바르셀로나, 마드리드에서 느낄 수 없는 정감이 있다. 두 번 간 레스토랑의 웨이터는 날 기억해서 더 반갑게 맞아주곤 했다. 이런 분위기에 스페인광장, 대성당, 맛있는 음식까지! 매력적인 도시다.

좌 : 스페인광장(김태희가 춤추던 그곳), 우 : 콜롬버스 묘가 있는 세비야 대성당

 호스텔에서 체크인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나와 같은 시간에 한국인 커플이 도착했다. 한국인을 만난 게 반가워서 남자분과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자친구랑 같이 여행 오셨나 봐요."

 "여자친구 아니에요. 맘에 드세요? 잘해보세요 한 번"

 

  농담을 세게 하시네? 당황스러웠다. 뒤에 있던 여성분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사생활을 캐묻기 싫어서 더 묻진 않았다.


 몇 시간 뒤, 호스텔 직원에게 플라멩코 공연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는 아까 만난 커플 중 여성분이 내 근처에 와서 물어본다.


 "플라멩코 공연 보러 가실 거예요?"

 "네. 스탭에게 괜찮은 공연을 추천받았어요. 내일 저녁에 볼 수 있대요."

 "내일 저녁이요? 저도 보고 싶은데 잘됐네요. 내일 같이 보러 가실래요? 표 한 장만 예약 더 해주세요."

 "한 장이요? 남자친구는 안 본대요?"

 "남자친구요? 아 그분 남자친구 아니에요. 그냥 동행이에요."

 

 사연은 이랬다. 그녀는 당시 고생 끝에 취업에 성공했고, 일을 시작하기 전 유럽 여행을 계획했다. 하지만 겁이 많아서 혼자서 유럽 여행은 엄두가 안 났다고 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동행을 몇 명 구했고, 생각보다 쉽게 5명이 모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여행 시작날짜가 임박하면서 하나 둘 사람들이 이탈했다. 결국 남은 사람은 남자 한 분과 그녀뿐이었다. 이미 숙소와 교통편을 다 예약해 둬서 취소하기가 아까웠다. 그리고 숙소는 모두 도미토리로 예약해서 염려하는 상황(?)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색한 관계지만 남자가 있으면 든든하기도 하다는 게 그녀의 계산이었다. 이미 스페인에 오기 전에 몇 개 나라를 그 남자와 함께 했고, 스페인 뒤 일정도 정해져 있다고 했다.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당시에도 이미 여자 홀로 유럽 여행이 보편화되어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모르는 외간 남자와 단 둘이 하는 유럽여행이 더 위태로워 보였다.(그리고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성격이 잘 맞는 거 같진 않았다.)


  플라멩코 극장에서 그녀의 선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8시 공연이었는데, 나는 미리 공연장에 도착해서 좋은 자리를 잡아뒀다. 그런데 그녀는 공연이 시작하고 나서야 헐레벌떡 들어왔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그러다 말겠거니 했는데, 진정을 못하는 거다. 공연 후, 타파스 가게에서 맥주를 함께 마시며 도대체 왜 울었는지 물었다. 공연장에 오다가 길을 잃었다고 한다. 공연은 놓칠 것 같고, 해는 지고, 후미진 골목이 무섭기도 해서 잔뜩 겁을 먹었다. 어렵게 자리에 앉으니 긴장이 풀려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고 한다. 이 상황을 보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래. 이런 여린 심성이면 혼자 오는 것보다 생면부지 남자와 같이 여행하는 게 낫겠구나.

당시 플라멩코 공연장. 객석이 바로 앞에 있어서 자리를 잘 잡으면 무희 바로 앞에서 관람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가치판단에 자신이 없어진다. 굳건히 고집하던 내 생각이 틀렸었다는 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시간이 지나서야 깨닫게 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다. 요즘은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이 입에 붙어버렸다. 섣불리 내 생각을 덧붙이지 못하겠다. 설령 이해가 안 갈지라도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정도까지만 생각하고 넘기게 된다.

 오래전 일이다. 일본에는 점심시간에 혼자 식당에서 밥을 먹는 직장인들이 많아서 놀랐었다. 일본에서 산 적이 있던 친구가 이유를 말해줬다. 일본인들은 '점심시간이라도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고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난 적잖이 놀랐다. 사회부적응자들의 나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우리나라도 이제 혼자 밥 먹는 것이 매우 보편적이다. 일단 나부터도 누군가와 식당에 가는 것보다 혼자 한 끼 해결하는 것이 더 빈번하다. 그때는 틀렸지만 지금은 맞는 걸까? 이렇듯 가치판단은 상대적이다. 신원미상의 남자와 단 둘이 여행하던 그녀가 그 당시에는 이상해 보였지만, 미래에는 '시대를 앞서간 자'로 추앙받을지도 모른다.

 그때 내가 그녀에게 말실수를 하지 않았을지 불안하다. 혹시 같잖은 오지랖을 부리며 주제넘은 충고를 했던 건 아닐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인 게, 그곳이 세비야라서. 부디 amigo의 농담으로 들어주었길(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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