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복잡할 때. 너무 많은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울 때. 그럴 때는 이 사진을 떠올린다.
야경이 예쁜 도시를 좋아한다. 차분한 밤과 도시의 조명들. 이것들은 잊고 있던 생각들을 떠오르게 만든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백야 로망스' 야경투어를 신청했다. 2시간가량 가이드분이 차량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야경 명소를 돌아보는 프로그램이었다. 러시아의 '문화수도'라 불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계획도시이다. 애초에 표트르대제가 유럽에서 예쁜 명소들을 작심하고 심은 도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다. 그만큼 해외 관광객이 많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러시아의 엄숙한 분위기가 이 도시에서는 덜하다. 야경도 멋지다. 성 이삭 성당, 바실리곶, 피의 사원까지. 그날 내가 한 투어 코스에는 거를 타선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야경투어를 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네바강 유람선을 타고 밤바람을 맞기만 하더라도 왜 이곳이 '북방의 베네치아'로 불리는지 알게 될 테니.
야경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카메라다. 요즘 고사양 스마트폰들은 2억만 화소 렌즈로 DSLR 못지않은 사진을 찍어낼 수 있다지만, 그 당시에는 사양이 그 정도는 아니었다. 주간 사진은 스마트폰으로 찍어도 근사하게 찍어낼 수 있었지만, 야경을 찍기에는 화질이 아쉬웠다. 나는 여행을 준비하면서 소니 중고 카메라를 구입해서 갔다. 큰맘 먹고 가는 여행이라, 좋은 사진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분명 상트페테르부르크 야경 사진이다.
카메라가 스마트폰보다 무조건 사진이 잘 나오는 건 아니다. 카메라를 잘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찍으면 아무리 비싼 카메라도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다. 조리개, 셔터스피드, ISO 감도 등 피사체에 맞게 적합한 설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를 가져도, 무지성 셔터만 눌러댄다면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다. 나 같은 카메라 초보가 사진을 찍다 보니, 초점 잃은 사진이 제법 나온다. 심지어 무엇을 찍은 사진인지 모르는 사진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묘하게 그 초점 잃은 사진이 맘에 들었다. 아련하기도 하고.
여행 후, 친구에게 이 초점 잃은 사진을 보여줬다. 러시아에서 찍은 사진인지, 집 앞에서 찍은 사진인지 분간도 못하는 이 정체불명의 사진을. 그리고 한마디 보탰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할까?"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하나'라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 헛나왔다. 아마도 그 당시 복잡한 내 현생과 사진의 상태가 섞여서 그렇게 말이 나왔나 보다. 눈치 빠른 친구는 중언부언 말을 보태지 않고 딱 한마디 건넸다.
"너 자신이지."
그 친구가 어떤 의도로 이렇게 답했는지는 모르겠다. 되묻지도 않았다. 그 친구는 별생각 없이 한 말일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의 말을 '주변 상황에 흔들리지 말고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생각은 이따금 선택의 순간에서 의사결정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이제는 미뤄왔던 선택을 해야 할 것 같다. 어느 쪽에 초점을 잡을지 정해야 한다. 미루기만 하다가 시기를 놓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여행이 더 생각난다. 초점이 없는 사진을 찍던 그때의 나와 닮아서. 나 자신에게 초점을 잡아야 함을 까먹지 않고 싶어서. 부디 내가 초점을 잡고 나면 상트페테르부르크만큼 멋진 장면이 보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