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소개팅

음악을 사랑한 그

by 수련

4월의 남산은 연둣빛 나뭇잎들이 기지개를 켜는 계절이었다. 개나리와 벚꽃이 서로를 부축하듯 나란히 피어, 첫 만남의 서툰 발걸음에 어색한 산책길을 내어준다. 하얀 원피스 자락이 나풀거릴 때마다 길가에 납작 엎드린 민들레 그 품으로 넘나 든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은 젊은 날의 마음처럼 가볍고 조심스러웠다. 그 봄날에.


청주에서 음악다방 여러 곳을 운영하는 젊은 사업가. 과장님이 침이 마르게 자랑하며 소개팅을 주선한 조카, 이야기의 주인공을 명동의 한 찻집에서 생애 처음으로 소개팅을 했다. S사 홍보실의 신입사원이었던 나, 스물네 살 꽃띠 여자의 앞에 네 살 많은 그는 훤칠한 키에 훈훈한 모습으로 어른스러운 척했지만, 긴장감이 역력했다. 과장님은 소개를 마치고 둘만의 시간을 보내라며 자리를 내어주었다.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실내에 흐르는 카펜터스의 "Top of the World"였다.

"사랑이 사람을 세상의 정상에 올려놓는다는 노래말이라고 한다." 카펜터스는 미국의 혼성듀오이고 카렌과 리처드인 남매가 활동하는 세계적인 듀엣으로 인정받는 가수라고 소개했다. 유명한 노래로는 ‘Yesterday Once More’, ‘Only Yesterday’, 등 매우 많은 히트곡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다운 해설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찻집에 흐르는 음악을 설명할 때 특별한 울림이 있었다. 교육자 집안의 장남이 안정된 직업을 원하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교사를 1년 만에 그만둔 후, 좋아하는 음악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그는 자신의 선택을 믿는다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우리는 세 번을 만났다.

첫 번째 만남에서는 남산 봉수대까지 천천히 걸어 올라 남산타워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30분간 숨을 고르며 오른 계단 끝에서 만난 풍경은 아찔했다. 발아래 펼쳐진 시내가 그림처럼 아름다운 건물과 지붕들, 저마다의 삶을 품고 있을 집들이 번화했다.

두 번째 만남은 경복궁이었다. 오백 년 역사의 기와지붕 아래를 걸으며, 그는 청주에서 미래의 삶을 얘기했다. 그가 설계하는 미래는 구체적이고, 평온하며 따뜻했다.

세 번째 만남에서도 우리는 그가 좋아하는 음악다방으로 갔다. 그는 신청곡을 적어 유리박스 안의 DJ에게 보냈다. Say You Say Me, Greatest Love of All, Invisible Touch, Higher Love. 사랑을 주제로 하는 노래는 아늑한 다방 안을 채워졌지만, 우리 사이의 대화는 점점 무거워졌다.

그는 나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포니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제안했다. 명동의 왕돈가스 집에서 두툼하고 바삭한 돈가스를 먹으며, 우리는 말하지 않은 속마음을 솔직하게 주고받았다.

"서울을 떠날 수 있나요?"

"청주를 떠날 수 있나요?"

친구들은 "저 정도면 놓치기 아깝지 않니?" 조건이 좋다는 것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고민했다. 나는 서울에서 살고 싶었다. 그는 고향의 청주를 터전으로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서로를 향한 호감은 있었으나, 같은 곳을 바라보지는 못했다.


우리는 웃으며 말했다.

"3년 동안 서로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다시 한번 봐요."

그 약속이 이별을 부드럽게 감싸는 인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후 나는 사내 연애를 했고, 이듬해 가을 결혼했다. 그는 그렇게 내 삶의 페이지를 조용히 넘겼다. 우리는 각자의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하고 나를 스쳐 간 인연에 대해 생각한다. 만약 그와 특별한 관계로 인연이 이어졌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청주의 어느 저택에서,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거실의 안주인으로, 전혀 다른 풍경으로 살고 있지 않았을까. 몇 개의 음악 전문 카페를 확장하며, 음악 애호가들과 어울리는 삶. 서울의 빌딩 숲 대신 충청도의 하늘을 보며 낭만적으로 살았을까 상상해 본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 떠오른다.

"두 갈래 길이 노란 숲 속에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오래도록 서서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굽어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중략)

두 갈래 길 앞에서 우리는 하나의 길만을 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길을 선택했느냐가 아니라, 선택한 길 위에서의 태도이다. 선택은 무엇인가를 남기고, 다른 것은 포기하게 한다. 그리고 선택하지 않은 길은 영원히 '만약'의 영역으로 남는다.

그 '만약'은 후회라기보다, 삶을 더 깊게 만드는 여백이다. 오히려 기억 속 삶의 풍요로움이다. 가지 않은 길이 있기에, 선택한 길의 가치를 더 깊이 인식하게 된다. 다른 가능성이 있었음을 알기에, 내가 가는 길의 소중함을 안다.

남산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봄이 오면 어김없이 벚꽃이 피고 진다. 자물쇠 공원을 지나 봉수대로 오르는 계단 길은 여전히 아름다운 산책길이다. 하지만 하얀 원피스를 입고 설렘을 안고 걷던 스물네 살의 나는 시간 속으로 사라졌다.


다른 길 위에서 특별한 사랑을 만났고, 행복한 울타리에서 아들, 딸을 키웠고 지금은 다른 계절을 지나고 있다. 누구나 마음속에 '가지 않은 길' 하나쯤 품고 산다. 그것은 때로 아련한 그리움으로, 가끔은 조용한 위로가 되기도 한다. 완성되지 않았기에 변하지 않는 기억,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순수한 순간, 스쳐간 인연은 상처가 아니라, 내가 선택하여 살아온 선물이다.


4월의 봄이 오면 남산의 그 길을 생각한다. 꽃은 활짝 꽃망울이 터졌을 때도 예쁘지만 질 때도 아름답다. 떨어짐이 끝이 아니라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시간임을 알기 때문이다. 인연 또한 그렇다. 붙잡지 못했어도, 그 순간을 통과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도 잘살고 있겠지, 살짝 궁금하기도 하다.


올해도 겨울이 지나면 머지않아 세상은 연둣빛으로 빛날 것이다. 나는 두 갈래 길 앞에서 망설이던 그 봄날이 있었기에, 이 길을 더 단단히 걸어갈 수 있다. 선택의 길은 앞날에도 여전히 노란 숲 속 어딘가에 남아 있겠지만, 오늘도 내가 선택한 길 위에서 한 걸음씩 나아간다. 그 봄날처럼.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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