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스승/브런치 작가반

혼자 쓰지만, 함께 성장한다

by 수련

전주에서 한 남학생이 찾아왔다. 방학을 맞아 글쓰기 수업에 참여하러 기차를 타고 왔다고 했다. 짧은 상고머리에 검은 뿔테안경, 단정한 교복 차림이다. 그는 학교에서 경험한 청소년 폭력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으며, 언젠가 장편소설을 펴내고 싶다고 말했다. 장래 희망은 소설가이자 체육 교사가 꿈이라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장편 한 권을 완성해 보고 싶다는 그 학생의 눈빛은 또렷하고 맑았다. 브런치에 글을 쓰며 문장을 키우고 싶지만 방법을 몰라 먼 곳까지 찾아온 열정이 대견하다. 별빛은 멀리 있을 때보다 가까이에서 볼 때 더 또렷하다.


106호 강의실에는 십 대부터 칠십 대까지 함께 앉아 있다. 서로의 세월은 다르지만, 종이 위에서만큼은 나이가 지워진다. 첫 문장 앞에서는 모두가 같은 표정이 된다. 망설임과 두려움, 기대가 겹친 얼굴. 그 공통점 하나로 우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퇴직 후의 시간은 처음엔 달콤했다. 늦잠을 자도 괜찮고, 약속이 비어 있어도 불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여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하루는 솜사탕처럼 부풀어 있다가도 금세 사라졌다. 손에 쥔 것 없이 저녁을 맞는 날이 반복되자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때 시작한 것이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일이었다. 매주 한 편씩 쓰기로 마음먹었고 실행 중이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듯 문장을 끌어올렸다. 한 줄을 쓰면 하루의 윤곽이 잡혔고, 한 단락을 마치면 마음이 정돈되었다. 글은 거울이었다. 흐릿했던 나를 또렷하게 비추는 거울. 아름답지만은 않았으나, 정직했다.


발행 버튼을 누르는 날이면 어김없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숙제를 제출하는 학생처럼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글이 세상으로 나간 뒤에는 이상하게도 속이 맑아졌고 긍정적인 마인드가 생성된다. 비가 그친 뒤의 청량한 공기처럼.

‘이 기쁨을 주변에 나누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씨앗이 되었다. 글쓰기를 망설이는 주변 지인들에게 조심스레 권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했다. 쓰고는 싶지만 어렵지 않겠느냐는 말. 그 망설임은 두려움이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문고리를 잡을 용기가 없는 모습이었다.

마침, 모니터링 단원으로 활동하는 평생교육원에서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었고, 글쓰기 모임을 제안했다.

무지한 스승

이름하여 ‘무지한 스승’ 브런치 작가 반이다. 관심분야 동영상을 보고 배우며 서로 의견을 나누고 동행하는 자리. “첫 문장을 함께 써봅시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글쓰기에 더없이 좋은 시절이다. 예전에 글은 특별한 사람들의 몫처럼 여겨졌다. 원고지를 채우고, 편집자의 문턱을 넘어야 독자를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은 오늘 쓴 글이 실시간으로 누군가에게 닿는다. 내가 잠든 사이 낯선 이가 내 문장을 읽는다.


글쓰기는 자기 안의 것을 꺼내놓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꺼내놓을 자리가 이렇게 많아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두렵지만 또한 경이로운 세상이다. 작은 문장 하나가 타인의 하루에 스며들 수 있으니 말이다.


더 반가운 것은, 이제 글쓰기가 더 이상 고독한 수행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로의 문장에 귀 기울이며 조금씩 진솔하게 성찰하게 한다. 지난 10월에 개강한 수업은 몇 달이 흐르는 동안 여덟 명이 브런치 작가 승인을 받았으며 글동무로 활동 중이다. 처음에는 막막해하던 이들이 이제는 독자를 생각하고, 주제를 묶어 매거진 기획을 고민한다. 막연함은 방향으로, 두려움은 시도로 바뀌었다.


수업 시간에는 한 편씩 글을 읽는다. 아들과의 갈등을 담담히 풀어낸 이야기, 장인에게 보내는 편지, 장기기증에 대한 고백, 어린 시절 어머니의 밥상을 떠올린 기록…. 평범한 일상이 문장이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흔한 글이 아니다. 흙 속에 묻혀 있던 씨앗이 햇빛을 만난 듯 새로운 숨을 얻는다.


왜 이 글을 썼는지,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묻고 답하는 시간 속에서 글은 혼자 쓰지만 성장은 함께 한다. 글쓰기는 우물을 파는 일과 닮았다. 처음에는 삽질뿐인 듯 보이지만, 어느 순간 맑은 물이 퐁퐁 솟는다. 그 청정한 물을 맛본 사람은 다시 삽을 든다.


나는 더 많은 이가 자신의 삶을 기록하길 바란다. 특별해서가 아니라 소중하기 때문에. 거창해서가 아니라 진실하기 때문에. 오늘 누군가 적은 한 문장이 언젠가 한 권의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씨앗 속에는 이미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들어 있으므로.


글을 쓰는 사람은 삶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이 모이면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해지리라는 것을 믿는다. 오늘도 일상을 낯설게 보는 연습을 하며 문장을 탐색하러 도서관에 간다. 지금이 글쓰기에 좋은 계절이기 때문이다. 좋은 계절은 기다리고 준비하는 자에게 온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글쓰기 반은 계속된다.




*무지한 스승 글쓰기반에서 글동무로 활동하는 에쩨르 작가님의 감동적인 글 한편 소개합니다.

https://brunch.co.kr/@096fa94c255c49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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