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소리/ 다시 잎을 틔우는 시절

봄은 자연보다 먼저 청춘에게 온다.

by 수련

봄을 마중하며 아침 산책길에서 봄의 소리를 듣는다.

공원 숲 속 풀밭에 아기 주먹만 한 참새 새끼들이 모여 있다. 열 마리쯤 될까. 작은 부리로 바삐 먹이를 쪼며 소란을 피운다. 겨우내 황량하던 숲에 다시 생명의 기척이 돌아왔다. 공기는 아직 차갑지만, 계절은 이미 방향을 틀었다.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 지나고, 숲은 조용히 몸을 풀고 있다.


청소년 센터 옆 농구장도 달라졌다.

겨울 동안 썰렁한 바람만 드나들던 곳인데 요즘은 공기가 후끈하다. 패딩을 벗어둔 학생들이 반소매 차림으로 세 팀으로 나눠 공을 다툰다. 공이 골대를 통과할 때마다 함성에 놀라 한참을 바라본다. 서로 어깨를 밀치며 달리는 몸짓에는 봄이 먼저 들어와 있다.


복숭앗빛으로 달아오른 얼굴, 번쩍이는 눈빛.

공을 향해 튀어 오르는 청소년들을 바라보면 봄은 나무보다 먼저 저들의 핏속에서 꿈틀거리는 듯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녹슨 심장에도 피가 돌아, 나도 모르게 젊어진 기분이 든다.

농구.jpg 농구장


산책로를 조금 더 오르면 양지바른 둔덕에 노란 복수초가 피어 있다. 눈 속에서도 피어난다는 그 꽃 옆에 보라색 봄까치꽃이 얼굴을 내밀었다. 산수유나무 가지에는 병아리 솜털 같은 꽃망울이 통통하게 부풀었고, 오래된 매화나무에는 연분홍 꽃이 막 눈을 뜨고 있다. 봄은 이렇게 차례차례 꽃을 불러내며 숲을 깨운다.

백수초.jpg 복수초와 봄까치꽃

대밭 울타리 아래에서는 직박구리 몇 마리가 부산스럽다.

짝을 찾고 둥지를 준비하느라 나무 가지 사이를 오가며 짧은 노래를 남긴다. 미루나무 꼭대기의 까치 부부도 바쁘다. 겨우내 눈, 비, 바람에 헝클어진 둥지를 고치느라 마른풀과 잔가지를 물어 나른다.

산수유.jpg 산수유, 매화

봄은 요란하지 않지만, 분명한 생명의 기척으로 희망을 전한다.

숲길을 걷다 보면 나는 종종 아름드리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나무는 평생 한자리에 서있다. 햇볕이 더 따뜻한 곳으로 옮겨 갈 수도 없고, 물이 많은 곳을 찾아 떠날 수도 없다. 그런데도 나무는 불평하지 않는다. 주어진 자리에서 흙과 물과 햇빛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시간을 견딘다.


그 우직함 덕분일까. 나무에는 늘 친구가 찾아온다.

해 질 무렵 붉은 노을이 가지를 스치고, 밤이 되면 달이 걸린다. 바람은 때로 살랑거리고, 가끔은 거칠게 숲을 할퀴고 지나간다. 새들은 마음 내킬 때 찾아와 둥지를 틀고 노래를 남기고 떠난다. 나무는 그렇게 홀로 자리를 지키며 더불어 살아간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나무와 닮았다.

삶에도 계절이 있기 때문이다. 꽃이 피는 때가 있고 잎이 초록으로 무성한 때가 있으며, 황금색의 계절이 지나면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시절이 온다. 나무는 일 년에 네 번 꽃을 피운다고 한다.


봄에는 화사한 꽃을, 다음에는 어린잎이라는 꽃을, 가을에는 단풍이라는 알록달록한 꽃을, 겨울에는 설경 속의 눈꽃을 피운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초봄의 어린잎이다.

겨울을 견디고 막 돋아난 연둣빛 잎은 어떤 꽃보다 강한 생명의 빛을 품고 있다.


숲 속 느티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맑은 햇살이 비춰 들고 청정한 소나무 향이 콧구멍을 벌름거리게 한다. '삐익 삐익' 새들의 이중창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속에 쌓였던 미움과 응어리가 서서히 풀린다. 이곳은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 나의 안식처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바람에 휘청거리는 날에도 나무는 아무 말 없이 나를 품어준다. 마음속의 쓰린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주고 괜찮다고 말해준다. 묵묵히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다시 시작해 봐' 용기와 힘을 건넨다.


문득 농구장에서 뛰어오르던 청춘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용수철처럼 솟구치던 몸짓. 그 장면 속에서 나는 봄(spring)을 읽는다. 무엇이든 다시 시작해도 된다는 봄의 신호를. 새로운 봄을 맞이하며 작년의 그 꽃이 아니고 같은 나비는 아니지만 매년 변화하는 계절을 알고 찾아주는 인연들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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