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맛

비오는날의 풍경

by 수련

올해도 봄이 오는 가 싶더니 갑자기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면서 눅눅한 장마철이 시작되었다. 지난밤 뒤척이다 깨어보니 어느새 곁에 와 있는 오래된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어린 시절 산밑의 외딴집 장마철 지붕을 톡톡 두드리는 빗소리는 어린 나를 품에 안은 할머니의 자장가 같고, 지붕에서 내려오는 물받이에서는 빗물이 흘러내리며 작은 폭포 소리를 냈다. 그 소리 안에서 습한 집 안 공기는 무겁고, 장독대 옆 고무신도 물을 먹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날이면 집안 가득 기름 냄새가 피어오르곤 했다. 후덥지근한 공기에 덮인 마음을 부엌에서 지글지글 기름 튀는 소리로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부침개를 시작하면 부뚜막의 들기름 냄새가 먼저 습기를 밀어냈고, 솥뚜껑 위에 얇고 노릇한 호박전이 얹히면 집 안 공기가 서서히 가벼워졌다.

애호박은 반질반질 윤기가 나면서 고운 연두색을 입은 채 산밑의 풀숲 속 호박잎으로 가려진 채 여기저기 달려있다. 뒷산 밑 척박한 땅도 그냥 놀리지 않고 부지런한 아버지는 돼지 축사의 거름이나 닭똥을 퍼다가 구덩이를 파고 거름을 준다. 흙을 고르고 둔덕에 작은 구명을 파고 호박씨를 두세 알씩 넣고 덮어준다.


햇살과 바람, 비를 맞으며 산 밑의 흙에는 쌍떡잎 새싹이 나오고 금세 넝쿨이 퍼지면서 노란 꽃이 핀다. 꽃술에는 윙윙거리는 꿀벌들이 들렀다가, 다시 산 너머 어딘가로 흩어졌다. 벌들이 떠난 자리엔 손가락만큼 통통하게 살이 오른 초록색의 애호박이 매달렸다. 햇볕을 며칠 마신 후 주먹만큼 커지면 그것들을 따다 어머니는 동그란 호박전도 만들고 채를 쳐 반죽에 섞으셨다. 들기름을 두른 솥뚜껑 위에 얹으면 어느새 부침개가 노릇하게 익어간다. 기름 종지에 무 꼬리를 콕 찍어 손뚜껑 팬에 바르던 모습은 어쩐지 조심스럽고 경건해 보였다.

장맛비가 처마를 타고 흐르는 날, 커다란 대나무 채반에 호박부침개가 하나둘 포개질 때마다, 어머니는 대청마루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셨다. 뛰어놀던 아이들은 벌떼처럼 모여 젓가락을 휘둘렀고, 입술이 반질거리며 작은 눈이 더욱 초승달이 되어 히죽거린다. 호박부침개는 고소하고 달콤하다. 음식이라기보다 비가 오는 날의 풍경에 가까웠다. 빗소리와 부침개는 서로 닮아 정겨운 소리로 계절의 감정을 불러오는 단짝이다.


부추밭은 집 근처 길모퉁이 작은 자투리 밭에 대파, 쪽파와 같이 뾰족하게 심겨 있다. 부추는 경상도, 전북사투리로 정구지라고 하고 고향 충청도에서는 졸이라고 불렀다. 부추전은 텃밭에서 낫으로 쓱쓱 두 번 정도 베어 물에 살살 흔들어 씻는다. 밀가루 반죽에 섞어 얇고 빠삭하게 부치는 게 특징이다. 곁들이는 소스는 집 간장에 양파와 청양고추를 썰어 넣고 집에서 만든 막걸리 식초를 한 숟갈 넣는다. 매콤하고 새콤한 간장을 콕 찍어 먹는다. 부추전은 사랑방에서 아버지와 이웃 아저씨들이 막걸리와 같이 드셨다.


결혼 후 9명의 대식구 맏며느리이며 외며느리로 살면서, 비 오는 날 그때 어머니의 손맛을 흉내 내어 부침개를 부친다. 겁도 없고 익숙한 듯 반죽을 하면서 나는 늘 그 시절을 다시 걷는다. 신김치에 오징어를 썰어 넣고 기름 두른 팬에 올리면, 묵은지 특유의 시큼한 냄새와 오징어의 바다 내음이 만나 한껏 풍성해진다. 바삭하고 고소한 김치전, 부추 향이 입안에 퍼지는 부추전 비 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음식이다. 무엇을 부치든, 그것은 어머니의 부엌에서 흘러나온 기억의 잔향이다.


우리는 부침개라고 하고 부침이라고 하기도 하고 지짐이라고 하는 등 이름도 다양하다. 지역마다 재료에 따라 각양각색의 맛을 낸다. 부침개는 취향대로 재료를 넣고 튀김가루와 밀가루를 혼합하여 만들면 쉬운 음식이지만 불조절이 중요하다. 센 불로 팬을 예열하고 중불보다 약간 센 불로 지져야 바삭하다. 각종채소와 버섯을 넣어 만든 야채 전, 노란 콩을 갈아 만든 콩전, 해물파전, 녹두전, 경상도에서는 배춧잎을 크게 부쳐낸 배추 전을 즐겨 먹는다.


조용히 내리는 빗소리처럼 정겨운 부침개는 빗소리를 닮은 음식이다. 장마철, 회색으로 가라앉는 날씨에도 부침개의 고소한 냄새는 마음을 붙잡고, 지친 기분은 어느새 들기름 냄새에 업혀 기지개를 켠다. 거실창으로 보이는 빗방울을 보며 김치전 한 조각을 찢어먹을 때면 시골집의 시원한 우물마루에 앉아 대밭에서 내어주는 청정한 바람과 빗소리를 듣는 것 같다.


그리움은 특별하지 않다. 프라이팬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는 소리, 무심하게 쏟아지는 장대비, 그리고 다정한 젓가락 싸움에서 피어난다. 이 계절의 눅눅함도, 어머니의 부침개 앞에서는 기꺼이 초록빛 추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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