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 가득 콩국수
여름이 오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뽀얗고 고소한 콩물이 담긴 그릇, 둥글게 말아 올린 국수 위로 오이채와 깨소금이 소복이 얹힌 그 한 그릇. 그 맛은 단순한 국수 한 그릇이 아니었다. 그 속엔 여름날의 풍경이, 고향의 시간이, 가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들판을 가득 메운 콩잎이 바람결에 흔들리던 그 여름. 고향의 풍경을 기억하는 어린 시절
이따금 콩밭 앞에 멈춰 두 눈 가득 푸른 잎을 담고, 잎 사이로 수줍게 피어난 연보라색 콩꽃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조용하고 담백한 그 아름다움은 마음속 어딘가에 그리움으로 담겨있다.
아버지는 새벽이면 밭으로 향하셨고, 어머니는 무성히 자란 풀을 뽑으며 콩밭을 돌보셨다. 우리는 땀을 흘리며 콩 고랑의 그 풀 무더기를 밭둑 한편으로 옮겼고, 뜨거운 계절이 지나면서 콩은 연둣빛 콩깍지를 달고 우리에게 돌아왔다. 때론 알찬 다섯 형제가 나란히 들어 있었고, 때론 텅 빈 깍지가 손에 쥐어졌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삶도 그러하다.
기대한 만큼의 열매를 맺지 못해도 실망보다는 이젠 익숙함이 자연스럽다.
계절이 흐르며 콩은 자라난다. 콩잎이 누렇게 옷을 갈아입으며 바람에 흔들리던 잎이 물기를 잃고 떨어진다. 아버지는 콩을 낫으로 베어 밭둑에 세워 며칠을 말리셨고, 마당에 멍석을 펴고 도리깨질을 한다. 툭툭, 리듬에 맞춰 콩깍지를 두드릴 때마다 노란 콩이 바닥으로 톡톡 쏟아졌다. 콩이 무덤처럼 쌓이는 사르락 소리, 아이들은 바가지로 퍼서 큰 자루에 담는다. 쏴쏴 쏟아지는 소리가 재미있어 까르르까르르 소리를 낸다. 마당 한쪽 농사용 선풍기는 낡아서 덜덜거리며 늦은 바람을 일으켜 콩 껍질을 날리고, 어머니는 키를 흔들어 쭉정이를 선별한다.
빈 콩깍지는 겨우내 땔감으로 사용하고 그 콩은 곳간으로 들어가 우리 가족의 1년 양식이 되었다.
볏짚과 콩을 섞어 소죽을 끓이고, 메주를 만들어 된장을 담그고, 두부를 만들고 무엇보다 여름이면 콩국수를 만들어 먹는다. “밭에서 나는 소고기”라 불리는 콩은 다양하게 변신하며 가족의 건강을 지켜주었다.
엄마는 광에서 콩 두 됫박을 꺼내 물에 담가두신다. 가마솥에서 콩을 삶고, 맷돌에 갈아 하얗고 고소한 콩국을 만드셨다. 시간이 흐르며 신일 믹서기가 등장했고 일은 훨씬 간편해졌지만, 많은 양을 하다 보면 믹서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간혹 탄내 같은 이상한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러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갈아야 했다. 그 정성만큼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점심 무렵이 되면 국수를 삶고, 찬물에 헹궈 둥글게 말아 그릇에 담았다. 콩국을 붓고, 오이채와 깨소금을 얹으면 그날의 더위도 함께 가라앉는 듯했다. 땀을 닦던 아버지, 부채질하던 엄마, 국수 그릇을 내밀던 언니의 손이 떠오른다. 함께 하던 그 시절은 시간이 데려가 버렸지만, 그 여름의 맛은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텔레비전에서 고향 마을 ‘면천’이 소개되었다. 전국의 숨은 맛집을 찾아다니며 음식을 소개하는 방송이다. 면천의 특산품인 콩을 갖고 콩국수를 만들어 파는 식당 이야기다. 100년 된 가정집을 개조하여 2대째 이어지는 콩국수 집이 소개되었고, MC 전현무와 탤런트 박정수가 맛있게 콩국수를 먹는 장면이 화면에 보인다.
나도 모르게 주방으로 들어가 콩을 씻어 불린다. 백태와 서리태를 7대 3으로 삶아 곱게 간 콩물에 삶은 국수를 얹었다. 서리태는 겉모습은 까만색이지만 씻어 불리고 껍질을 벗기면 알갱이는 초록색으로 백태보다 고소함이 녹진하다. 콩물 위에는 절구에 찧은 참깨와 소금을 섞은 깨소금을 듬뿍 얹는다.
식탁 위의 콩국은 시원하고 고소하여 더위에 지친 입맛을 사로잡는다. 어린 시절 집 뒤의 대밭에서 불던 청정 바람과 대청마루에서 가족들이 모여 앉아 콩국수를 먹던 그 풍경이 다시 떠오른다. 그 맛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거기에 ‘그리움’이라는 양념이 조금 얹혔는지도 모른다.
오늘 밤, 잠들기 전 마당 너머 콩밭에서 들려오던 바람 소리와
들판을 뛰놀던 내 모습이 꿈에 다시 찾아오길….
그때처럼 넓은 콩밭의 초록 물결은 부드럽게 흔들리고,
흰색, 보라색의 수줍은 듯 피어 있는 콩꽃을 만날 수 있기를….
[콩국수 만들기 ]
흰콩, 서리태 2컵, 2~3인분, 소면 200g, 오이 1/2개, 방울토마토 2개
소금 1~2큰술, 통깨 1~2큰술, 볶은 땅콩
(만드는 법)
1. 콩을 씻어 3배 물을 부어 7시간 불린다.
2. 콩과 불린 물을 냄비에 붓고 끓어오르면 중간 불로 25분간 삶는다.
3. 삶은 콩은 찬물에 헹구어 가볍게 문질러 겉껍질을 벗겨낸다(국물이 깔끔하다).
4. 믹서기에 삶은 콩과 참깨, 땅콩을 넣고 처음엔 부드럽게 저속으로 갈고 농도를 봐가면서 물을 보충하여 고속으로 1분 더 갈아 준다.
5. 면을 3~4분 삶아 찬물에 헹구어 전분기를 빼주고 물기 없이 돌돌 말아준다.
6. 오이는 채 썰고 방울토마토는 보기 좋게 자른다.
7. 그릇에 국수를 담고 오이와 토마토를 얹고 콩국을 적당히 붓고 깨소금을 듬뿍 얹는다.
**탕수육을 찍어서 먹는 파와 부어서 먹는 파가 있듯이 시원한 콩국을 먹을 때, 지역마다 사람마다 간을 하는 취향이 다르다고 한다. 충청도는 대부분 소금을 넣고, 전라도는 설탕을 넣는다고 한다. 우리 집은 깨소금을 넣는다. 소금, 설탕 어느 쪽을 선호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