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긋한 깻잎 김치
깻잎 향기 가득한 하루
주말 아침, 친구의 초대로 안성으로 향하는 길은 유난히 푸르다. 도시의 아스팔트를 빠져나오자, 창밖으로 펼쳐지는 들녘은 고개를 살짝 젖힌 벼들이 초록빛으로 파도를 치듯 살랑이고 있다. 정년퇴직 후 고향으로 귀농한 친구가 정성스레 가꾼 시골집의 풍경이 그 속에 있다. 그 풍경은 잊고 있던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고향과 닮은 풍경이다.
마당 끝에는 자두나무, 앵두나무, 그리고 포도 넝쿨이 낮게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시중에서 파는 과실보다 작은 보라색 자두 열매는 햇빛을 받아 핏빛으로 익어가고, 포도송이는 연보랏빛 속살을 꼭꼭 숨기며 매달려 있었다. 그 그늘을 지나며 오래전, 고무신을 벗고 앵두나무에 올랐던 여름날을 떠올렸다. 초여름이면 가지마다 동그랗고 영롱한 붉은 열매가 매달렸다. 입술이 빨갛게 물들도록 앵두를 따 먹던 그 시절, 달콤함 뒤에 남던 떫은맛마저 선명했다.
친구는 바구니를 건넨다. “깻잎이 무성하게 자랐어. 따러 가자.” 밀짚모자를 쓰고 목장갑과 토시로 완전무장하고 친구와 들길로 향했다. 큰길 끝에 드러난 들깨밭은 마치 누군가 초록빛 스웨터를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짠 것처럼 깻잎이 촘촘하다. 반짝거리는 깻잎이 햇살 속에서 잔잔히 흔들리며 우리를 맞았다. 빽빽한 깻잎을 솎아 바구니에 한 장씩 담을 때마다 코끝에 차오르는 향은 고향의 공기처럼 낯설지 않았다.
깻잎을 따던 손끝이 문득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여름날, 어머니와 언니를 따라 들깨밭으로 향하던 길. 후끈한 바람에 땀이 맺히면, 어머니는 한 손으로 이마를 훔치고 다른 손으로 묵직한 바구니를 옆구리에 붙이셨다. 깻잎을 바구니 가득 따와 우물가에 담가놓았다. 흐르는 물에 흔들어 씻으면 옆에 앉은 나는 물기를 탈탈 털어 50장씩 세어 무명실로 묶는 일을 했다. 진한 소금물에 담가 누름돌을 얹고 뚜껑을 덮어 두면 며칠 뒤 노르스름하게 변한 깻잎은 부드러운 결속에 어머니의 하루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삭힌 깻잎은 찬물에 여러 번 헹구어 짠맛을 뺀 후 실고추와 갖은양념을 켜켜이 얹고 들기름을 한 바퀴 두른 후 밥솥에 살짝 쪄낸다. 깻잎찜은 보드랍고, 고소해서 하얀 밥 한술에 얹어 먹으면 그야말로 별미였다. 어린순으로는 깻잎 볶음으로 나물을 만들고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향긋한 깻잎 김치를 만들었다. 비 오는 날엔 찹쌀가루로 튀김옷을 만들어 간식이 없던 시절 입이 궁금한 아이에게 과자 대신 고소한 맛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시절에는 몰랐다. 손톱에 파란 물이 들도록 깻잎을 따고, 양푼에 가득 양념을 만들고, 찹쌀풀을 쑤는 일이 어머니의 긴 하루였다는 것을. 무더운 여름날 그 손길 안에 가족을 향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어머니의 고단한 일상은 뒤로하고 고소한 튀김과 맛있는 밥상을 당연한 듯 기다리곤 했다.
집으로 돌아와 깻잎을 한 장 한 장 깨끗이 씻었다. 물기 빠진 깻잎을 채반에 차곡차곡 세워두고, 어머니가 하던 그대로 깻잎 김치 양념에 정성을 들인다. 고춧가루에 액젓, 다진 마늘, 채 썬 양파, 당근을 넣고 찹쌀풀을 끓여 식혀서 어우러지게 만든다. 고소한 향과 함께 기억도 끓어오른다. 옛 기억을 되살리듯 깻잎 두 장씩 사이에 양념을 발라 김치통에 정성껏 담았다.
몇 시간 후, 김치통을 열자 매콤하면서도 달큼한 향이 퍼졌다. 깻잎은 양념을 고르게 머금고 적당히 숨이 죽어 있다. 그 향기 하나만으로도 입 안에 침이 고이고, 마음이 든든하다.
여름 깻잎은 연하여 바로 김치를 해도 부드럽고 맛있지만, 가을에 채취한 깻잎은 억새기 때문에 씻은 후 30장씩 묶어 끓는 물에 살짝 데친 후 양념을 바르면 부드럽고 오래 두고 먹어도 변질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깻잎의 효능을 찾아보니 특히 여성들에게 좋은 음식이다. 철분 함량이 높아 하루에 4장 정도만 섭취해도 빈혈 예방에 도움이 되고 베타카로틴, 폴리페놀 성분이 활성산소를 제거해 혈관질환 예방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깻잎 김치는 그리움의 맛이다. 입맛 없을 때 누룽지 밥에, 수육 한 점을 감쌀 때, 또는 하얀 밥 한술에 얹을 때마다 그 시절 어머니의 손맛이 생각난다. 조용한 여름 오후, 바람 한 줄기에도 손에서 깻잎 향이 스며드는 듯한 착각이 든다.
작은 반찬 하나가 하루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된다. 정성과 계절의 숨결이 담긴 깻잎 김치 한 접시는 거창한 진수성찬보다 깊은 위로를 준다. 가족의 밥상에, 우리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수 있는 그런 따뜻함을.
깻잎 한 장, 한 장에 마음을 얹는 일. 그것이 내가 어머니의 음식을 기억하며 요리하는 기법이다.
오늘도 식탁 위에 깻잎 김치를 꺼낸다. 반짝이는 깻잎, 촉촉이 머금은 양념, 그리고 그 위에 어머니의 향기.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밥을 한술 뜬 후 착 감싸서 먹으면 한 숟갈에 사라진 밥그릇을 보며 하루를 또 살아가게 한다.
깻잎 김치 만들기
(재료)
깻잎 100장, 고춧가루 5스푼, 간장 5스푼, 액젓 2스푼, 매실청 3스푼, 찹쌀풀, 마늘 5쪽, 청양고추 2 개, 홍고추 2개, 쪽파 한 줌, 생강 반쪽, 양파 반 개, 참기름 1스푼, 통깨 1, 생수 반 컵
(만들기)
1. 깻잎은 식초 탄 물에 10분 정도 담근 후 깨끗이 씻어 물기를 탈탈 털어 준비한다.
2. 양파와 당근은 채 썰고 쪽파, 마늘, 생강, 홍고추, 청양고추는 곱게 다져둔다.
3. 큰 볼에 고춧가루, 마늘, 찹쌀풀, 액젓, 매실청, 생강 양파 등 모든 양념을 넣고 빡빡하면 생수를 조금 넣어 간을 맞춘다. (찹쌀풀은 양념이 깻잎에 잘 달라붙게 함, 계량은 어른 밥 수저)
4. 꼭지를 절반 정도 가위로 자르고 양념을 2~3장씩 겹친 깻잎 위에 골고루 펴 바른다.
5. 실온에서 반나절 숙성 후 냉장 보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