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감자수제비
입추가 지난 후 날씨는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해졌다. 동남아 지역의 스콜처럼 갑자기 많은 비가 쏟아진다. 비 오는 날, 왜 유난히 따끈한 국물이 그리운 걸까. 창가에 매달린 빗방울이 차곡차곡 모여 흐르는 순간, 자연스레 냄비 속 수제비를 떠올린다. 국자에 담긴 감자와 하얀 수제비 한 조각, 뜨거운 국물에 적셔 후후 불어먹는 그 짧은 찰나에 마음의 허기마저 사라진다.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내리며 흙냄새가 코끝에 닿는 순간, 수제비를 뜨고 싶은 충동이 인다. 유년 시절의 고향 집 부엌이 먼저 생각난다. 대청마루에는 보자기가 깔리고 스테인리스 양푼에 밀가루 반죽이 놓여 있고, 우물가에는 껍질을 벗긴 감자가 물속에 잠겨 있었다. 촉촉하고 눅눅한 부엌, 그러나 그 안은 언제나 따뜻했다. 세차게 쏟아지는 처마밑의 빗소리를 들으며 어머니는 감자수제비를 끓이셨다. 콩밭이 비에 젖어 일손이 멈춘 날, 부엌은 오히려 더 분주하다.
육수를 만들기 위하여 멸치와 마른 새우가 국물 속에서 내뱉는 ‘뽀글뽀글’ 숨소리, 그것은 빗소리와 합창하는 부엌의 흥겨운 노랫소리 같다. 감자와 연둣빛 애호박은 반달 모양으로 썰려 들어가고, 조선간장은 국물에 깊이를 더했다. 파와 마늘이 들어가는 순간, 부엌에서 배어 나오던 코끝의 냄새는 지금도 나를 배고프게 한다.
내가 하는 일은 반죽을 거드는 일이었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 밀가루에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나무 주걱으로 휘휘 저어 밀가루를 뭉치게 하는 일이다. 어느 정도 반죽 덩어리가 모양을 갖추면 어머니의 손끝으로 주물러 어느새 반죽은 아기 엉덩이 살결처럼 보드라워지고, 면포에 덮여 부드러운 호흡을 이어갔다. 기다림 끝에 국물 속으로 얇게 떠서 흩뿌려지는 하얀 조각들이 떠오르면 수제비가 완성되었다.
대청마루는 시끌벅적하고 넉넉했다. 커다란 양은 냄비 가득 끓인 수제비는 이웃과 나누어도 모자람이 없었다. 당숙 어른과 아버지는 막걸릿잔을 기울이며 논밭의 농작물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아이들은 국물 속을 헤엄치는 수제비를 집어 올리느라 바빴다. 수제비 한 조각을 후후 불어 입에 넣는 순간, 쫄깃한 식감과 포슬포슬한 감자가 우려낸 깊은 맛, 애호박의 단맛, 열무김치의 아삭함이 유난히 빗소리와 잘 어울렸다. 비 오는 날의 눅눅함을 잊게 해 주었다.
감자수제비 한 그릇은 단순히 허기를 때우는 음식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시작된 사랑이고, 가족이 둥글게 모여 앉아 나누던 정이었다. 뜨거운 국물 한 숟갈 속에는 든든하게 배를 채우는 기쁨과 마음을 덥히는 온기가 담겨 있었다.
지금도 빗소리가 창문을 두드리면, 나도 모르게 냄비를 꺼내고 육수를 만든다. 감자 껍질을 벗기고, 손으로 밀가루 반죽을 치대며 어머니의 수제비를 흉내 낸다. 부엌에 번지는 육수의 그 비슷한 냄새가, 잠시나마 나를 어린 시절로 되돌려놓는다. 감나무 아래 평상에서 매미 소리를 들으며, 흙 묻은 손으로 수제비를 떠먹던 그 아이가 되어 있다.
비 오는 날의 감자수제비는 결국 가족과 함께했던 고향의 먹거리이고 그리움이다.
그리고 문득 생각한다. 먼 훗날 나의 아이들도, 빗소리와 함께 나를 떠올려줄까.
[감자수제비]
재료: 밀가루 2컵, 감자전분 2스푼, 미지근한 물 반 컵, 소금 반스푼, 식용유 1스푼
육수(멸치, 다시마, 건새우로 15분 우려낸 6~7컵), 감자 2 개, 애호박 반개, 당근 조금,
대파, 양파 등 채소, 조선간장, 후추 톡톡
(만드는 법)
1. 밀가루에 감자전분을 넣고 올리브유를 섞고 미지근한 물에 소금을 넣어 녹인 후 조금씩 부어 반죽합니다. 처음엔 수저로 살살 저어 반죽하고 어느 정도 뭉쳐졌으면 손으로 골고루 치대어 표면이 반질반질 부드러운 질감이 되도록 만들어 지퍼백에 넣어 냉장고에서 40분 이상 숙성시킵니다.
2. 멸치, 건새우를 볶아 비린내를 제거한 후 대파 뿌리와 다시마를 넣고 20분 끓여 건더기를 건져냅니다. (코인 육수 3개를 사용하면 편리함)
3. 감자는 반달 썰기를 하여 물에 3분 정도 담가 녹말을 뺀다(국물이 탁해짐을 방지함). 육수에 감자를 먼저 넣고 끓이다가 반죽을 최대한 얇게 떠서 넣습니다.
4. 수제비가 떠오르면 반달 썬 호박을 넣고 양파, 당근을 넣는다. 청양고추는 곱게다져 넣은 후 간장으로 간을 맞춥니다.
5. 다진 마늘과 대파를 넣고 3분 정도 끓으면 완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