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건조기 옆에 아버지의 작업실이 있다. 주워 온 책상, 책장, 나무판 따위로 얼기설기 만든 볼품은 없지만, 없는 게 없는 작업실.
샘이 많은 아버지는 공구 욕심도 많아 새로운 공구를 보면 지나치지 못했다. 우리 집 지을 때 목수들이 허리춤에 찬 '타카'라는 공구에 꽂혀 있던 아버지가 몇 날 며칠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어느 틈에 '타카'를 모셔왔다. 워낙 비싼 공구라 '모셔 왔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읍내 고물상에서 발견했다는데, 가격은 절대 말하지 않았다. 딱 봐도 '타카'는 새것처럼 깔끔했다.
새 공구를 들고 신이 난 아버지는 합판에다 시범을 보였다. "타카 타카 타카..." 못이 박힐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컴프레서'라는 기계에 연결해 사용하는 거라 소리도 요란하고, 원상복구도 힘들었다. 전문가용 장비를 뭐 하러 샀냐고 해봤자 소용없다. 아버지는 합판에 박히는 타카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타카가 있을 정도면 다른 공구는 말할 필요가 없다. 전기톱도 여러 개고, 전동 드릴을 비롯해 용접기까지 있을 정도다. 쇠파이프도 자르고 간단한 용접 정도는 직접 하셨다. 작업장은 멀리서 보면 너저분해 보여도 가까이 가보면 나름대로 분류와 정리가 잘 되어 있다. 비싼 공구는 나무장에 자물쇠를 달아 보관했고, 나머지 공구들은 비슷한 종류별로 분류해 놓았다. 사실 공구의 종류와 가짓수가 많아 뭐가 있는지 잘 모른다. 없는 걸 찾는 게 더 빠를지 모르겠다.
아버지 머릿속에서만 완벽한 공구 리스트. 아버지는 수시로 공구를 확인하고 뭐가 없어졌는지 즉시 안다. 망치라도 쓰고 말을 안 했다간 날벼락이 떨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될 수 있으면 아버지 작업실 근처는 가지 않는다.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는 속담처럼 불똥이 튈 수 있는 소지를 미리 차단하는 것이다. 만약 어쩔 수 없이 공구를 쓰게 된다면 미리 허락을 받고 사용하며, 사용한 즉시 제자리에 원상 복구해야 한다.
공구뿐 아니라 농기계도 웬만한 건 다 있다. 낙향 후 시작한 농사라 농기계를 다 갖출 필요가 없는데도, 없는 거 없이 다 있다. 농기계를 사기 위해 농사를 짓나,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농기계는 당장 돈이 없어도 구입할 수 있다. 농협에서 잔뜩 빚을 내주니, 구입이 쉽다. 마을에서 누군가 뭔 기계를 샀다 하면 참지 못하고 달려간다. 고가의 일제 트랙터도 구매해 작년에 겨우 할부를 다 갚았고, 트랙터에 달리는 각종 장비도 다 있는 편이다. 거름이나 비료를 뿌릴 때 사용하는 바가지도 종류별로 있고, 두둑 치는 기계, 비닐 멀칭하는 기계...
작년 여름엔 콩 터는 기계까지 새로 사셨다. 그동안 누가 쓰던 기계를 중고로 얻어 썼는데, 낡은 기계로 콩을 털 때마다 분진을 홀라당 뒤집어써야 했다. 새 기계만 있으면 다 된다며 벼르고 별러, 콩 터는 기계를 샀다. 드디어 작년 가을 새 기계로 콩과 깨를 털었는데, 어찌나 깔끔하게 콩이 분류되어 나오는지 아버지가 몇 번이고 감탄했다. 이제 콩이고 깨고 걱정이 없다며 좋아하셨다. 물론 분진도 거의 뒤집어쓰지 않아 나도 신세계를 경험했다. 엄청 좋아했던 그 기계를 고작 한 해밖에 써보지 못하다니...
농사짓는 사람은 남이 가진 농기계에 관심이 많다. 혹여 초상이 나거나 농사를 그만 두면, 쓰던 농기계는 헐값에 팔려나간다. 아버지에게 농기계가 많다는 건 이미 마을에 소문났다. 아버지 장례식장에 오신 분 중 누군가는 트랙터를 팔 거냐고 물었다. 동생은 단호하게 안 판다고 했다. 트랙터는 아버지 분신과도 같아서 당장 팔 기 어려웠다. 화장터까지 쫓아와서 콩기계 팔 거냐고 묻는 동네 사람도 있었다. 엄마도 단호히 안 판다고 했다.
올해 농사가 끝나간다. 아버지 트럭 옆으로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한 농기계가 전시장처럼 늘어서 있다. 팔자니 아깝고, 두자니 고물이 된다. '인생은 장비빨'이라지만 주인이 사라지면 장비도 다 고물상 차지다. 일 년이 다 되도록 먼지를 뒤집어쓰고 꼼짝 않는 농기계를 볼 때마다 마음이 착잡했다. 살아계신 동안에 농사 욕심을 조금씩 줄이고, 아버지 스스로 기계를 처분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연히 스웨덴 할머니가 쓴 에세이를 읽다가 '데스클리닝(death cleaning)이란 말을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비해 자신의 물건을 미리 정리하자는 스웨덴식 미니멀 라이프'라고 소개된 이 말이 큰 울림을 주었다.
"데스클리닝은 한마디로 세상을 떠날 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남기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가 직접 치울 수 있는 온갖 잡동사니를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 치워줬으면 좋겠는가? (...) 나는 추억은 간직하면서 삶은 더 단순하고 소박하게 꾸리고 있었다. 정신적, 육체적 짐을 덜어내고 나자 내 진짜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르가레타 망누손, <초콜릿을 참기에는 충분히 오래 살았어>, 알에이치코리아
스웨덴 할머니는 '최대한 가볍고 유쾌하게' 접근하라고 한다. 죽음은 어렵지만, 데스클리닝은 그렇지 않다며 '지금보다 나은 때는 없다'라고.
오늘 아침 엄마가 콩 터는 기계를 제값 받고 팔았다. 심지어 동네 사람 두 명에게 약간의 흥정을 붙이는 기술까지 부리셨다. 엄마의 기술에 걸린 아저씨가 트랙터를 몰고 마당으로 들어와 콩 기계를 싣고 갔다. 주말에 콩을 털 모양이다. 화장터까지 따라와 콩 터는 기계에 욕심을 냈던 먼 친척뻘 되는 아저씨다.
"엄마가 장사에 소질 있네. 쇼부도 칠 줄 알고!"
나는 너스레를 떨며 엄마를 칭찬했다. 돈 때문인지 내 칭찬 때문인지 엄마의 얼굴이 상기됐다.
목돈이 들어온 엄마는 내친김에 경운기와 거름 뿌리는 바가지도 팔겠다고 한다.
아버지가 못한 데스클리닝을, 어쩌면 엄마는 가능할지 모르겠다.
최대한 가볍고 유쾌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