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기괴한 소리에 잠이 깼다. 고라니다. 시골에서 이렇게 기괴하게 우는 건 고라니밖에 없다. 근데 울음소리가 너무 가까웠다. 녀석이 마당까지 내려온 모양이다. 마당과 이어진 밭 뒤쪽에 산이 있어 고라니들이 종종 나타난다. 이렇게 가깝게 고라니 소리를 들은 건 처음이다.
개가 깰까 봐 걱정이 됐다. 살금살금 걸어가 1층을 내려다보니, 녀석들이 깊이 잠이 들었는지 꿈쩍도 안 했다. 다행이다. 10살도 더 된 노견들이라 나보다 더 깊이 잠을 잔다. 개들을 살피는 사이, 고라니 소리가 멈췄다. 다시 자려고 누웠지만,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고라니가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같았다. 어쩌면 그저께 사고를 당한 녀석을 찾는 소린지도 모른다. 혹시 엄마일까? 아니면 형제자매? 새벽에 들려온 고라니 소리에 혼자서 의미부여를 하며 망상에 빠진다. 그저께 밭에서 죽은 고라니가 떠올랐다. 하필 그때 거기서 마주칠 줄이야...
그제 저녁 개들에게 사료를 주려고 나와 보니 달빛이 환했다. 개들이 밥그릇을 비우자, 나는 밭쪽으로 올라갔다. 달빛도 환하고, 가을밤공기에 발이 저절로 밭쪽으로 향했다. '달밤에 웬 산책?' 개들이 눈을 반짝이며 신이 나서 앞서 갔다. 달빛에 밭이 훤했다. 여름에 고생하며 심은 배추도 속이 들어찼고, 밑동이 굵어진 무도 얼굴을 삐쭉 내밀었다.
그때 갑자기 청량한 밤공기를 뚫고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났다. 개들이 고라니를 물었나 보다. 평상시보다 몇 배는 더 기괴한 소리가 났다. 소리 나는 곳은 움푹하고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비명소리가 훨씬 더 절박해졌다. 나는 동생에게 전화해 손전등을 가져오라고 했다. 반바지에 슬리퍼차림이라 풀숲에 들어가기 어려웠다. 비명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콩밭 쪽에서 더 날카로워졌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동생이 나무 막대와 손전등을 들고 올라왔다.
"에구, 잡혔네, 잡혔어. 밤에 밭에 왜 왔어?"
동생이 힐난조로 물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동생도 내 대답 따위는 듣지도 않고 풀숲으로 들어갔다.
손전등을 비추자, 땅에 쓰러진 고라니 얼굴이 보였다. 진돌이가 목을 물고 있어 꼼짝을 못 했다. 진돌이와 진순이를 불렀지만, 녀석들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오로지 고라니만 보고 있었다. 개들에게 여기저기 물린 고라니는 일어서지를 못했다. 동생은 막대기로 개들을 쫓았다. 더 이상 개들이 고라니를 물지 못하게. 나는 집으로 달려가 개줄과 간식을 가져왔다. 개들을 부르며 간식봉지를 흔들었지만, 녀석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라니는 커다란 눈을 꿈벅이며 숨을 헐떡이고 있다. 이제 고라니는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힘겨워 보였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모습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짠하다. 티거가 그랬고, 아버지가 그랬고, 지금의 저 고라니가 그렇다.
동생이 막대로 개들을 쫒자, 녀석들이 내게로 왔다. 나는 잽싸게 녀석들을 목줄로 묶고 집으로 끌고 내려왔다. 녀석들은 칭찬을 해달라는 눈빛으로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나는 녀석들을 혼냈다. 녀석들은 여전히 왜 혼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아버지였다면 고라니를 잡았다고 칭찬을 하며, 고기를 몇 점 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십 년을 살아온 녀석들인데, 갑자기 혼이 났으니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밭에서 내려온 동생이 고라니가 죽었다고 말해주었다. 동생은 개들을 한 차례 더 혼냈다. 몸에 고라니털을 잔뜩 묻힌 녀석들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꼬리를 흔든다.
한바탕 소동이 끝났다. 나는 죽은 고라니에게 미안했다. 고라니 잘못도, 녀석들 잘못도 아니다. 내 잘못이다. 시골에 살면서 밤에 함부로 돌아다닌 죄다. 8년을 시골에 살았건만, 여전히 나는 풋내기다.
다음날 엄마에게 말하자,
"잘 됐네. 우리 밭에 오던 애야. 배추 먹던 애가 콩까지 먹으러 왔네. 잘 죽었어." 하며 웃었다.
나는 다짐했다. 이제 밤에 절대 녀석들을 데리고 다니지 않겠다고. 밭쪽에는 얼씬도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