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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오 Oct 26. 2024

가슴 아프게

<오빠, 남진>이란 다큐멘터리를 보고 왔다.

가수 ‘남진’을 좋아하냐면, 전혀 아니다. 남진 노래를 즐겨 듣는 것도 아니다. 우연히 예고편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남편에게 가자고 하니, 흔쾌히 따라나섰다. 물론 남편도 트로트를 듣지는 않는다.


객석이 50석뿐인 작은 극장에서 팝콘도 과자도 먹을 수 없다기에,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객석엔 우리 빼고 4명의 관객이 띄엄띄엄 앉아있었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분들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주인공 남진의 인터뷰가 나왔다. 데뷔 시절 인터뷰와 함께, 젊은 남진이‘가슴 아프게’라는 노래를 불렀다. "당신과 나 사이에~" 첫 소절을 듣는 순간, 아버지가 좋아하던 노랜데,라고 중얼거리다 눈물이 터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물이다. 과자봉지도 못 뜯게 할 정도로 조용한 극장 안에서 느닷없이 눈물이 터져버린 것이다.


나는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눈에 갖다 댔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봇물 터지듯 터져버린 슬픔이란 감정이 물밀듯이 밀고 올라왔다. 이렇게 우는 내가 낯설었다. 이런 곳에서 이런 방식으로 울어본 적이 없는데, 아버지 가신지 4개월이 넘었다. 같이 살면서 이 꼴 저 꼴 다 보고 밑바닥까지 본 것만 같아, 난 아버지가 죽어도 울지 않겠다고 남편에게 말하곤 했다. 그랬는데 이런 작은 극장에서 남진 노래를 들으며 울고 있다니. 아버지가 지금 내 꼴을 본다면 비웃을 게 뻔하다. 그렇게 기세등등하더니, 꼴랑 노래 한 소절에 눈물이 터지냐며, 웃고 있을 거다.

노래하는 남진 목소리가 꼭 아버지 목소리 같았다. 술만 드시면 부르는 트로트도 싫고, 노래 제목도 몰랐는데, 기억에만 남은 아버지 목소리가 벌써 그리워질 줄이야! 노래가 다 끝날 때쯤 정신이 들었다. 터진 봇물이 잦아들었다. 뒷줄에 앉은 아주머니가 어쩐지 이상하게 볼 것만 같았다. 전혀 울 내용이 아닌데, 흐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남편 보기도 민망했다.


영화 내내 남진의 노래가 나왔다. 아버지가 남진 노래를 꽤 좋아했고 잘 불렀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딱히 취미랄 게 없는 아버지의 취미는 술 마시고 노래 부르는 거였다. 노래방이 동네마다 들어서기도 전에 아버지는 고가의 노래방 기계를 사서, 생일날이나 명절이면 노래를 불렀다. 언젠가 아버지는 마을회관에서 팔순 잔치를 하게 되면 밴드 마스터를 부르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밴드 부르는 값이 얼만데 그러냐며, 그냥 회나 드시라고 했다. 아쉽게도 아버지는 밴드를 불러 팔순 잔치를 하는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45년생 아버지와 46년생 남진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남진은 금수저 집안 늦둥이 외아들로 일찌감치 서울로 유학 와서 대학을 다니며 문화적 세례를 받고 탑스타가 되었다. 아버지는 깡촌,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국민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장남이 아닌 관계로 집안 농사일을 돕다가 배가 고파서 서울로 도망 나온 처지다. 남진이 대학을 다닐 때, 아버지는 리어카에서 쪽잠을 자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고 들었다. 아버지 부대가 월남으로 파병됐을 때 남진도 어찌어찌하여 월남에 오게 됐단다. 그래서 아버지가 남진을 좋아하게 된 걸까? 아버지는 월남 가서 번 돈으로 지금의 땅도 사고, 카메라도 사고, 장가도 갔다.

남진의 일대기를 듣다 보니, 갑자기 아버지 삶도 궁금해졌다. 내세울 게 없던 삶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아버지의 젊은 시절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내가 태어날 때쯤 부잣집 사장의 운전수 노릇을 했다고 들었는데, 그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남진 노래를 불렀을까? 아버지의 서울살이는 어땠을까?

아는 게 없다. 미리 들어 볼걸... 이제는 정말 들을 수 없다.

8개월만 더 사셨더래도 마을회관에 밴드마스터를 불러서 팔순잔치를 했을 텐데, 아버지가 부르는 '가슴 아프게'노래가 생생한 밴드의 음향을 타고 마을 구석구석을 울렸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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