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날도, 불안한 날도, 슬픈 날도 다 지나가고 기쁜 날이 올 거예요.
어제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서안이는 나를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며
“뭐야? 너 나가려던 거 아니었어?”
하고 물었다.
“그랬는데.. 일이 좀 있었어.”
내가 대충 얼버무리며 말하자
“아, 쌤한테 걸렸구나! 어쩔 수 없지. 공부한 거 아까우니까 이왕 걸린 거 시험 열심히 쳐!”
서안이는 이렇게 응원해주고는 자기 자리로 가서 다음 과목 공부를 했다. 선생님한테 걸린 걸로 생각하는 게 어제 나에게 일어났던 어마어마한 일들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한번 어깨를 으쓱 해 보이고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날, 부모님이 경악하실 줄 알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집으로 갔지만 오히려 최선을 다했으니 괜찮다고, 공부만큼 컨디션 관리와 휴식도 중요하다고 하시며 나에게 용돈을 쥐여 주셨다.
하굣길이다. 매일 서안이와 같이 걷던 하굣길을 혼자 걸으려니 조금 어색해진다. 어제 시험은 아무것도 마킹하지 않았던 첫 번째 시험지 빼고는 모두 정답을 맞췄다. 선생님이 첫 번째 시험지를 내 눈앞에 들이밀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나를 붙잡고 물어보셔서 시험 공부하느라 잠을 못 자서 시험시간에 깜박 졸았다고 둘러대고 빠져나오느라고 애를 좀 먹었다.
내가 그 카페에서 일하게 되면 나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해낼 수 있을까? 아직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래도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 나갈 수는 있을 것 같다. 더 이상 공부만 하고 살지는 않을 거다. 사실 이젠 공부가 조금 지긋지긋하다. 어제 부모님한테도 말씀드려 보았다. 중학교 2학년은 다양한 경험을 해보며 보내겠다고. 부모님은 선선히 허락하시며 나쁜 길로만 빠지지 말라고 하셨다.
가슴이 떨린다. 오랜만에 누구의 강요도 없이 나 스스로의 의지로 해보는 일이다. 어느새 저 멀리에 카페의 입구인 지하실 문이 보였다.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작은 지하실 이 공원 크기 정도로 커졌다. 다시 봐도 신기했다. 저 멀리에 곰돌이 카페라는 간판이 크게 걸려있는 건물이 보였다. 어제 맡았던 달달한 냄새가 멀리서부터 풍겨왔다. 얼른 뛰어 가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딸랑, 경쾌한 풍경 소리와 함께 은은한 빛과 맛있는 냄새가 내 몸 구석구석으로 퍼졌다.
테이블에는 반쯤 먹다 남긴 스무디가 있었고 주방에는 사장님이 흔들의자에 누워서 졸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탄 냄새가 콧속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사장님도 그 냄새를 맡았는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오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난 후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검은색의 물체를 그릇에 내왔다.
“어어, 왔어요?”
“이게 대체 뭐에요?”
내가 놀란 표정으로 접시에 든 물체를 가리키자, 사장님이 의자를 가져다주면서 나한테 앉기를 권했다.
“케이크를 좀 굽고 있었는데 그만 깜박 졸아서 타버렸네요. 감정이 들어가 있는 것들은 많이 예민해서 조금만 방심해도 타버리거든요.”
“오늘도 손님이 있어요?”
내가 카페 안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카페 안에는 우리 둘밖에 보이지 않았다.
‘혹시 귀신도 손님으로 받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온몸이 오싹해졌다.
“오늘은 특별히 예약손님이 있어요. 저희 카페 단골손님이시거든요. 이곳에 카페를 차리기 전부터 자주 찾아주셨어요.”
다행히도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사장님이 손님에 대한 설명을 해 주셨다. 단골손님이라니..
딸랑, 경쾌한 풍경 소리가 들리며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한 남자아이가 들어왔다. 그 아이는 나를 보더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뒤로 할 발 물러섰다. 당황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이 같은 학교 다니나 봐요?”
사장님은 신나하며 얼른 우리를 한 테이블에 앉혔다.
“몇 학년이에요?”
다행히 ‘단골손님’께서 긴장을 풀고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2학년이요.”
“아, 저는 3학년 이정현 이에요. 이름이 뭐예요?”
“전 정아윤이에요.”
사장님은 통성명을 하는 우리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울상을 지으며 이정현 선배에게
“아 맞다! 예약하신 빵이 다 타버렸어요.”
“희망은 구하기 어려운 감정이라서 한 달을 넘게 기다렸지만... 조금 더 기다려 보죠 뭐!”
단골손님은 괜찮다는 듯이 헤헤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희망이라면 내가 어제 두고 간 감정이지 않나?
“어? 제가 어제 희망을 유리병에다 넣고 가지 않았나요?”그러자 둘의 시선이 갑자기 나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몇 초 뒤 사장님이 신난 듯이 박수를 치며
“그러면 빵을 다시 만들 수 있겠네요!”
하고 말하며 얼른 카운터 옆에 있는 유리병을 집어 들고 왔다. 어제 형형색색의 감정들로 채워져 있었던 유리병은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어제처럼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그때의 기분을 살려서 감정을 이 안으로 넣어 주면 돼요.”
나는 사장님의 말대로 어제의 기분을 떠올리며 유리병을 살짝 잡았다. 그랬더니 어제 봤던 감정들이 더 아름다운 빛깔을 띄며 유리병 속으로 들어갔다. 내 감정을 더 잘 이해하게 된 탓일까? 색깔도 더 또렷해진 것 같았다. 나는 그 유리병을 들고 조심히 사장님께 건넸다. 사장님은 유리병을 받아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단골손님은 둘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사장님이 단골손님이라고 하시던데 언제부터 여길 아시게 된 거예요?”
내가 물었다.
“한 2년쯤 된 것 같아요. 하긴, 그때는 사실 카페가 아니었어요. 감정 상담소였죠. 제가 그곳에서 사장님의 첫 손님이었어요. 그때는 사장님이 아니라 그냥 상담사 중 한 명이었죠. 하지만 사장님은 다른 상담사들과는 좀 달랐어요. 그전에 상담소에 왔다가 나아진 사람들의 감정들을 저한테 보여주셨는데, 그런 희망적인 감정을 보고 저도 좀 나아졌어요. 그러다가 상담소가 망하면서 사장님이 일자리를 잃게 됐어요. 그 다음부터는 아시다시피 이곳을 개업하게 된 거예요. 가끔씩 힘들 때는 음식이 위로해 준다고 하시면서 말이에요.”
단골손님이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테이블 위로 조각 케이크 두 조각이 올려졌다.
“다 듣고 계셨어요?”
“네, 진짜로 가끔씩 음식이 사람을 위로해 주기도 하죠.”
사장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조각 케이크 위에는 그 흔한 과일이나 초콜릿 장식도 없었다. 그냥 기본 생크림 케이크였다. 나와 단골손님은 거의 동시에 포크로 케이크를 한가득 떠서 입 안에 넣었다. 먹어보니 희망이 왜 구하기 힘든 감정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깜깜한 터널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것 같은 맛이었다. 갑자기 내 안에 있는 모든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 불안도 언젠가는 지나갈 것 같았다. 경직되어 있던 몸이 편안해지고,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힘든 날도, 불안한 날도, 슬픈 날도 다 지나가고 기쁜 날이 오리라고 믿는 게 바로 희망이에요. 행복에서 희망을 찾을 수도 있어요.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한 줄기 행복이 보이면 그건 곧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되죠. 작은 것에서도 희망은 생겨나요. 우리가 그걸 잘 보지 못할 뿐이에요. 잠깐이라도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그건 미래에 희망이 넘쳐난다는 의미이고, 계속 슬픈 날들만 지속된다면 그건 아직 출구를 찾지 못한 것뿐이에요.”
“진짜 그런 것 같아요. 저도 계속 슬프고 우울한 날들만 있었는데 서안이를 만나고 행복을 봤어요. 그게 곧 우울이라는 터널을 빠져나온다는 의미였나 봐요.”
내가 말했다.
“그러게요.. 언젠가는 끝이 보이겠죠?”
그렇게 말하는 정현 선배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왠지 좀 쓸쓸해 보였다. 저 선배는 무슨 일로 상담소까지 갔던 것일까?
“이제 문 닫을 시간이 됐네요. 다음에 또 와요.”
사장님이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시간이 지나도 이 밖에서는 시간이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이곳도 시간이라는게 있었다. 나와 정현 선배는 사장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 카페의 문을 열었다. 딸랑, 경쾌한 풍경소리가 울리더니 나는 어느새 우리 집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왜인지 앞으로 그 단골손님과도 자주 만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