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손님2

남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센 힘이 자신을 사랑하는 힘일지도 몰라요.

by 세아

내일은 드디어 반배정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다. 12시까지 밤을 꼴딱 새우고 다음날이 되자마자 반배정 사이트에 들어가서 같은 반이 된 친구들을 확인했다. 2학년 3반..

“망했다..”

나는 옅은 탄성을 내뱉었다. 같은 반이 된 아이들 중에는 아는 이름이 하나도 없었다. 혹시 뭔가 잘못되었나 싶어서 새로 고침을 끝없이 클릭해 봤지만 생에 처음 보는 그 이름들은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환하게 빛을 내며 그 자리에 있었다. 슬픔과 불안과 분노 그 어디쯤에 있는 내 마음을 억누르고 컴퓨터 전원을 신경질적으로 껐다.

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밝은 화면을 보다가 조명하나 켜지지 않은 방을 보니 더 깜깜했다. 마치 내 미래를 암시하듯 말이다. 며칠 뒤면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게 될 거고, 그 반에서 아는 사람이 없는 아이는 분명 나 하나뿐일 거다. 그러면 나는 점점 소외되기 시작할 거고 여름방학쯤까지 내 이름이 누구의 머릿속에도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직 시작도 안 된 1년이 벌써부터 걱정된다.

‘아아악!’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생각할수록 더 비극적인 쪽으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어쩌면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 있긴 했지만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불행한 일들에 대한 쪽으로 머리가 더 잘 돌아갔다. 결국 반배정을 확인한 그날은 밤을 꼴딱 새우고 말았다.

아침이 되자마자 주변 친구들을 총동원해서 내가 생전 처음 본 이름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기 반배정에 온 신경이 몰입해 있어서 내 말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시간이 남아나는 애들도 그냥 지나가면서 한두 번 들어 봤다는, 확실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나쁜 애는 아닐 거라는 추측성 답변밖에 들을 수 없었다.


드디어 첫 등교 날이다. 아침을 먹으면서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만큼 내 신경은 온통 반배정에 쏠려 있었다. 오랜만에 교복을 입으며 내 모습을 거울로 봤다. 하지만 곧 거울에서 시선을 돌렸다. 좀 잘생기게라도 태어났으면 친구 사귈 걱정은 하지 않았을 텐데 거울에 비친 나는 평범 그 이하였다. 성격도 평범. 교복 위에 가벼운 외투를 하나 걸치고 등굣길에 나섰다.

이제 봄이지만 아직도 칼바람이 교복 안으로 불어왔다. 까끌까끌한 교복의 촉감이 움직일 때마다 걸리적거렸다. 길에는 나와 똑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둘셋씩 같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내 걸음은 조금씩 빨라지더니 그 애들을 모두 제치고 교문 앞으로 도착했다. 아이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가다가 멈춰 서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학교가 들어서자 내 걸음은 갑자기 거북이보다도 느려졌다. 도저히 반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내 옆으로 어떤 여자아이 하나가 지나갔다. 혼자 등교한 듯했지만 입에는 싱그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 여자아이를 따라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아이가 걷는 모습은 마치 모델 같았다. 허리를 꼳꼳이 세우고 고개는 정면을 바라본 채로 나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곧장 어떤 반으로 들어갔다. 나도 무심코 따라 들어가려다 내 반을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복도로 나와서 아까 그 여자아이가 들어간 반이 몇 반인지 확인했다. 2-3, 우리 반이었다!


이제 같은 반에 친한 아이들이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갑자기 2학년 3반이 좋아졌다. 그 여자애는 2 분단 끝자리쯤에 앉아서 다른 아이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얼굴에서는 아까 보았던 싱그러운 미소가 또 피어났다. 나는 3 분단 끝자리에 앉았다. 주변에 있던 남자애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복도에서 오며 가며 몇 번씩 마주쳤던 아이들이었다. 나는 그 아이들의 조금 짓궂은 장난도 웃으며 받아 주었다. 그냥 기분이 좋았다.

한 해 동안 우리 반의 담임을 맡을 신라희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선생님은 웃으며 자기소개를 하시고 우리에게도 각자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하셨다. 이름과 특기, 좋아하는 음식 등의 형식적인 자기소개들이 지나가고 그 여자아이의 차례가 왔다.

“안녕! 나는 최하루야. 아직 장래희망은 정하지 못했고 딱히 엄청 잘하는 것도 없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 잘 지내보자!”

하루는 그 말을 하고 난 뒤 교실을 둘러보며 눈웃음을 짓고는 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이 작게 ‘하루하루’라고 말하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하루와 눈이 마주쳤다. 하루는 나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그리고 나도 하루에게 웃어 주었다. 하루의 웃는 모습은 정말 예뻤다. 그 순간부터 내 모든 것이 행복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때는 정말 행복했어요. 마치 정신을 뭐에 빼앗기기라도 한 것처럼 평소라면 화낼 일도 웃고 넘어가게 되더라고요. 갑자기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고 하루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기뻐할 수 있었어요. 정말로 세상에 마법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 정도로요.”

이야기가 끝나고 내가 곰돌이에게 말했다.

“그게 바로 사랑의 힘이죠. 꼭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어도 부모님이 주시는 사랑이나 친구끼리의 우정,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도 사랑의 힘을 느낄 수 있어요. 제가 이 일을 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모든 감정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감정이 바로 사랑이라는 거예요.”

곰돌이가 내 등을 부드럽게 몇 번 토닥여 주었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 행복한 사랑의 맛이 음식으로나마 이렇게 빨리 찾아올지 몰랐다. 내가 이야기를 끝마치자 어느새 유리병에는 기분이 간질간질해지는 예쁜 색의 감정들이 있었다. 그동안 내 마음속에 있던 감정들이 이런 모양이었구나. 정말 예뻤다. 그렇지만 이제 저 감정들은 떠나 보내야 하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히 언젠가 다시 사랑이 찾아올 테니까요. 하지만 그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해요. 그래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돼요. 어쩌면 남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센 힘이 자신을 사랑하는 힘일지도 몰라요.”

나는 그렇게 말하는 곰돌이에게 그때의 하루가 한 것처럼 싱긋 웃어 주었다. 슬픈 기억을 다시 펼쳐보니 가슴이 저리긴 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괴롭지는 않았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저를 사랑할 줄 모르니까 하루를 너무 좋아하지만 막상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서 헤맨 적이 많아요. 표현도 많이 서툴렀었고요.”

“그럴 수 있어요.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쉽지 않은 거니까요. 다음에는 분명 마음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거예요.”

여자아이가 나를 위로하듯이 웃어 주었다.


“네, 저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곰돌이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또 만난다면 그때도 이렇게 행복하기를 바랄게요.”

걸어 나가는 나의 뒤통수에 대고 여자아이가 말했다. 문을 열자 경쾌한 풍경 소리가 들렸다. 마치 그 여자아이의 목소리처럼 경쾌했다.


어느새 나는 하굣길에 서 있었다. 내가 꿈을 꾼 건지 잠시 생각해 봤지만 이 둥둥 뜨는 감정을 보니 확실히 그건 꿈이 아닌 것 같았다. 옆에 있는 닫힌 자동차의 창문으로 내 얼굴이 비쳤다. 분명 아침에 거울을 봤을 때와 똑같은 얼굴이지만 뭔가 달라 보였다. 나의 웃는 모습이 조금은 더 잘생겨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로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제자리에서 높이 점프를 했다. 온몸이 붕 뜨는 그 짧은 1초도 안 되는 순간의 기분을 나는 그동안 계속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이제는 그 기분을 매일 느끼게 될 것 같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저 멀리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살펴보자, 여자아이 하나가 보였다. 그 카페에서 봤던 여자아이였다. 나는 여자아이가 있는 곳까지 뛰어갔다. 그 여자아이는 옆에 있는 친구와 얘기하고 있었는데 내 뛰어오는 발소리를 들었는지 뒤를 돌아봤다. 나를 알아보고는 반가운 듯 크게 미소 지었다. 친구에게 먼저 가 보라고 말했는지 여자아이의 친구는 가고 나와 여자아이 둘만 남겨졌다.

“사랑이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한 건 아니에요. 그냥 평소에도 자주 느낄 수 있는 감정인데도 그 쉬운 걸 잘 모르는 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많아요. 사실 저도 얼마 전까지는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으니 말 다 했지요. 그래도 이제부터라도 자신을 사랑하면 돼요. 그럼, 행운을 빌어요.”

여자아이가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서서 저 멀리 있는 친구를 향해 달려갔다. ‘정아윤’ 그 아이의 교복에 적혀 있는 이름이었다. 나도 아직 제대로 된 방법은 모르겠지만 이렇게 나를 사랑하기 위한 노력을 하다 보면 언젠가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그냥 사람 간의 사랑이다. 부모님의 사랑이든 친구 간의 우정이든 남녀 간의 사랑이든 반려동물을 향한 사랑이든. 이제는 난 그것들 모두 다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함께해 주며 아껴주고, 세상에서 가장 멋지다고 해주고, 언제나 만나면 사랑한다고 얘기해 주면 나는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나에게 그렇게 해줄 것이다.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깨를 쭉 펴고 고개는 조금 들고, 입가에는 싱그러운 미소가 머문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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