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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로포텐 제도의 오로라, 그리고 해프닝

노르웨이의 오로라 (2)

by Bora

스칸디나비아 여행의 시작부터 내 인생의 오로라를 만나고 나니 여유가 생긴다. 게다가 거의 매일 눈비로 가득한 이 지역도 내일까지는 맑을 것이라는 예보다. 날씨 나쁘기로 악명 높은 노르웨이 해안 지방에 오자마자 이렇게 좋은 날씨를 선사받다니.


캐나다 옐로나이프의 오로라는 주로 자정을 전후하여 떴는데 노르웨이 트롬소와 로포텐 제도의 오로라는 저녁 7~8시 경이 가장 강한 것 같다. 덕분에 한밤중까지 오로라를 찾아 헤매고 다니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


어제 하루 종일 장거리 운전으로 무리를 했기 때문에 오늘 오전은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소트란드 항구에 있는 스칸딕(Scandic) 호텔은 이번 여행의 베스트 숙소가 될 것 같다. 방도 넓고 쾌적한 데다 훌륭한 조식까지 포함이다. 신선한 노르웨이산 연어를 본고장에서 실컷 먹었다.

호텔에서 바라보는 해안 풍경도 아름다워 2박만 하고 떠나는 게 아쉽다.


점심 무렵 갑자기 뱃고동 소리가 부웅하고 울리길래 창밖을 내다봤다. 익숙한 디자인의 큰 배가 들어온다. 우리가 12년 전 오로라 크루즈를 위해 승선했던 후티루텐 여객선이다. 노르웨이어로 '익스프레스 루트'를 뜻하는 후티루텐은 연안 급행 여객선이면서 겨울철에는 오로라 크루즈의 역할도 한다.


배를 보니 '12년 전 우리가 이 항구에도 들렀었구나' 싶어 더욱 반갑다. 배는 호텔 바로 옆 부두에 정박했다가 10분 만에 선수를 돌려 외해로 빠져나간다. 소트란드에서는 승객이 타고 내리는 여객선 역할만 하는 모양이다.

오후에는 소트란드 주변에서 밤중에 오로라 관측을 하기에 적당한 사이트를 답사하고 바닷가 길도 산책했다. 해가 떨어지고 나면 날은 추워지지만 그래봐야 영하 2도, 걷기에 나쁘지 않은 온도다. 아름다운 황혼 속에 눈이 반사되어 은색으로 빛나는 마을 길을 걸으며 극북의 풍경에서 만나게 되는 파스텔톤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지나가는 길에 만난 냇물도 예사로운 개천이 아니라 유빙이 둥둥 떠다니는 북빙해의 모습을 닮은 얼음 하천이다.


이른 저녁을 먹고 6시 넘어 오로라를 찾아 나섰다. 출발하면서 오로라 앱 정보를 확인한 후 하늘을 올려다봤다. Kp 지수도 높고 별이 온 하늘에 반짝인다. 며칠 전의 흑점 폭발에 따른 태양풍이 오늘까지 영향을 끼친다니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미리 점찍어둔 해변에 도착, 오로라를 기다리기로 했다. 예상대로 7시 무렵 오로라가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엔 뿌옇게 나타나 오로라 같지도 않다. 진한 녹색의 오로라는 좀 더 강력해져야만 볼 수 있다. 오늘도 동에서 서로 띠를 만들며 나타났지만 좀 약해서 육안으로는 뿌옇게만 보였다. 곧이어 붉은 오로라가 사이사이 나타난다.


자세히 보면 칼처럼 날카로운 모양도 보이고 전체적으로 동에서 북쪽 하늘을 거쳐 서쪽까지 완전히 펼쳐졌지만 강도가 그리 센 편은 아니다. 그래도 붉은빛이 섞여 있어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한 시간 넘게 이쪽저쪽으로 출몰하는 오로라를 고개를 돌려가며 바라보다 한순간 아련하게 희미해지길래 나는 차에 돌아가서 쉬기로 했다. 앞으로 오로라가 더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싶은 건 그만큼 여유로워진 것이 아닐까.


"난 추워서 차에 먼저 가 있을게. 차 키 좀 줘.“

"잠깐만, 앗! 차 키가 어디 갔지?“

당황한 목소리로 차 키가 사라졌단다. 혹시 몰라 나도 파카 주머니와 여기저기를 뒤져봤지만 없다.

"아까 오로라가 이쪽저쪽에서 터질 때 급하게 플래시를 주머니에서 꺼내면서 키를 떨어뜨린 것 같아. 이동하면서 촬영했던 장소 부근을 전부 찾아봐야겠어.“

캄캄한 바닷가 자갈밭에서 검은색 차 키를 찾다니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보다는 나으려나? 사진을 한 군데에서 찍은 것도 아니고 네댓 군데를 옮겨가며 촬영했는데 찾을 수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함께 수색에 나섰다.


온통 검은색 자갈이 널려있어 해변의 모든 돌들이 차 키로 보인다. '왜 차 키는 검은색으로 만들어가지고, 밝은 색으로 만들면 좋잖아' 하고 구시렁거리며 눈을 부릅뜨고 불을 비춰봐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한 시간을 자갈밭을 헤맸지만 이건 아니지 싶다.

설상가상으로 밀물이 들어오며 조금씩 자갈밭이 잠기고 있다. 내일 밝을 때 다시 와서 썰물이 빠져나간 후 만에 하나 키를 찾는다 해도 그 키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J는 끊임없이 자책을 한다.

"내 탓이야, 평소에 차 키같이 중요한 건 반드시 안쪽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올리는데 오늘은 왜 바깥 주머니에 넣었을까.“

속으로는 끓어오르지만 그가 너무 자책하는 걸 보니 나까지 불평을 할 수가 없다.

"괜찮아. 렌터카 회사에 연락하면 해결될 거야. 불편하긴 하지만 치명적인 일은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면서 검색에 들어갔다.


인터넷에 '허츠 렌터카 키 분실'을 검색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차 키를 잃어버렸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그런 일이 많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세상에는 우리 말고도 바보 같은 사람들이 꽤 많다. 문제는 키를 분실한 장소가 차를 빌린 트롬소로부터 하루 온종일을 운전해서 와야 하는 장소라는 것.

"내일 아침에 호텔 체크아웃인데 어쩌지? 내일 차 키가 오지 않으면 이후 일정은 어째야 하나? 다 엉망이 되는 것 아냐?“


막막한 가운데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렌터카 회사에 전화를 했다. 사무실에 예비 키가 있기는 한데 내일 아침이 돼야 어떤 방법으로 보내줄 것인지 알려줄 수 있단다.


자, 이제 숙소까지는 어떻게 가지? 구글맵에서는 호텔까지 7.5km, 걸어서 1시간 40분 걸린다고 나온다. 택시도 없는 곳이지만 도로에서 지나가는 차에 손을 들어 도움을 요청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일단 차로 가 보자.


도로 옆에 세워둔 우리 차로 가서 혹시 차 주변에 키가 떨어진 건 아닐까 다시 한번 한 바퀴를 돌아봤다. 그런데 갑자기 차의 실내등이 켜졌다! 엥? 차 문은 계속 잠겨있는 상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문을 하나하나 열어보는데 운전석 쪽 문이 열린다. 어떻게 된 거지? 시동을 걸어봤다. 시동이 걸렸다! '키가 차에 없습니다'라는 안내가 나온다.


J가 차에서 내리더니 나보고 운전석에 앉아보란다. 키가 없다는 안내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나한테 키가 있는 건가? 다시 온 주머니를 뒤져본다. 헉! 바지 주머니 휴지뭉치 속에 차 키가 있었다!


그제야 J가 외친다.

"맞다! 아까 내가 차에서 내리면서 키를 줬었어. 아니, 그랬던 것 같아“

난 까맣게 잊어버려 그 키가 왜 내 주머니에 있게 됐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게다가 나도 분명히 온 주머니를 세 번은 뒤졌었는데 그게 휴지뭉치 속에 있을 줄이야.

그 와중에 오로라 사진을 제대로 못 찍었다고 또 아쉬워하는 J. 진짜 차 키가 없어졌을 상황을 생각하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아까 내가 키 없어졌다고 그에게 원망이나 비난을 퍼부었다면 엄청 면목 없을 뻔했다.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원망과 비난을 참길 잘했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심해지는 건망증. 이제 일상이라 아무렇지도 않지만 이렇게 사고를 치고 나면 울고 싶어진다.

어쨌든 해피 엔딩. 다행히 해프닝으로 끝났다.


차 키 때문에 한밤중에 난리를 쳤지만 우리는 오로라를 보기 힘든 로포텐 지역에 와서 벌써 두 번이나 오로라를 봤다. 12년 전에는 그리도 헤매고 다니다 나라별로 한 번씩만 간신히 봤었는데.

시작부터 이렇게 오로라 세례를 받는 걸 보면 이번 극대기가 세긴 센가 보다. 이젠 맘 편히 로포텐의 풍경을 즐길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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