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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자동차 사고를 겪다

노르웨이의 오로라 ((3)

by Bora

사흘 만에 로포텐 제도 안쪽으로 들어섰다. 로포텐의 풍경은 역시 소문대로 대단했다. 설산이 중첩되며 아름답게 이어지고 피오르드를 지나칠 때마다 푸른 바다와 함께 환상적인 풍경이 연이어 펼쳐졌다.


J는 떠나기 전부터 로포텐 하늘에 오로라가 떴을 때를 상상하며 촬영 포인트를 수십 군데나 찾아 두었다. 설산과 집들의 위치, 바다 표면에 비칠 오로라의 각도까지 계산해 가며 ”좋은 데가 너무 많다“고 행복한 비명을 질러댔다.


로포텐의 숙소는 로포텐 제도의 중간쯤에 위치한 스탐순드(Stamsund)라는 마을에 있다. 크지는 않지만 작은 마트도 있고 생기 있어 보였다. 서둘러 저녁을 먹고 나갈 채비를 하며 먼저 오로라 앱을 확인했다.


오로라 앱에는 오로라가 나온다는 표시를 말해주는 초록색 지표가 아예 보이지 않고, Kp 지수는 최저 수준으로 1에도 못 미치는 0.67. 오로라를 볼 수 있는 확률은 겨우 2%. 게다가 북해에서 밀려오는 두터운 구름이 로포텐으로 시시각각 접근 중이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비구름이 밀려올 예정이라서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고 믿었었다. 오는 길에 하늘이 청명하여 기대치를 높였는데 갑자기 이렇게 Kp 지수가 낮아지다니.


결국 그날 지구 어디에서도 오로라는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아예 밖으로 나가는 걸 포기하고 오랜만에 와인을 한 잔 했다. 나는 전날 보았던 ‘인생 최고 오로라’를, J는 ‘로포텐에서 한 번만 더’를 되뇌었다. 사실 나는 기대치 이상의 오로라를 이미 경험했으니 이제 아쉬움이 없다. 앞으로 보게 될 흐린 날, 비 오는 날 구름 속의 아련한 로포텐 풍경도 기대된다.


북극권의 하늘빛은 묘하게 아름답다. 특히 해뜰녘 하늘은 가라앉은 듯 침잠하고 은은하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그 빛은 더욱 오묘한 색깔로 마음을 홀린다.


우리는 극북의 바닷가를 계속 돌아다녔다. 정오의 태양조차 우리나라 오후 4시 무렵의 높이로 낮게 떠서, 벌써부터 황혼 준비를 하듯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천천히 어두워지는 황혼을 보면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하지만 해가 워낙 짧아 4시만 돼도 캄캄절벽이다. 맑은 날도 9시 넘어 해가 뜨고 3시도 전에 해가 지니 바깥 구경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대여섯 시간, 눈비가 올 때면 하루 종일 낮이 사라진 듯 어둠뿐이다.


로포텐 제도는 피오르드 사이로 솟은 험준한 산봉우리들, 거친 암석이 펼쳐진 해변, 그리고 빨간색 어부의 오두막 '로르부어'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절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어디서나 고개를 들면 깎아지른 산이 솟아있고, 해안가에는 예쁜 오두막들이 홀로, 혹은 줄지어 자리 잡고 있다.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하는 동안 지내던 로르브어가 지금은 최고의 숙소가 되어 관광객들을 끌어모은다.


로포텐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손꼽히는 레이네 마을을 거쳐 차가 닿는 마지막 마을 오(Å)까지는 다리와 터널로 연결되어 있다. 나는 알파벳 A 위에 작은 점을 올린 글자도 재미있고, 그 한 글자로 이름 붙인 마을이 로포텐의 끝 마을이라는 것도 신기했다. 발음은 '아'도 '에이'도 아니고 '오'로 한단다. ‘오’ 마을에는 새하얀 눈 세상에 작은 집들이 오밀조밀 자리하고 있었다.


로포텐의 바람은 정말 매서웠다. 차가 도달하는 마지막 지점에 차를 세우고 해안 길을 잠깐 걷는 동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세찬 바람 속에 눈송이가 마치 모래 알갱이처럼 얼얼할 정도로 얼굴을 때린다. 노출된 피부는 얻어맞은 것처럼 아프다. 고개를 숙여 얼굴을 보호하며 도망치듯 차로 돌아왔다.


마을마다 늘어선 대구 덕장은 강원도 황태 덕장을 연상케 한다. 산간 지방에서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말리는 황태와 달리 이곳은 바이킹 시대부터의 방식 그대로 나무틀에 걸어 북해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말리는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우리 숙소의 주인 케네스 말로는 말린 대구(Stock fish)가 너무 비싸 현지인들도 먹을 수가 없다고 한다. 대부분 이탈리아나 스페인으로 수출한다며 맛은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말린 대구 새끼 - 노가리랑 뭐가 다를까 싶어 점심때 식당에서 말린 대구를 넣은 햄버거를 시켜봤다. 어묵과는 다른 맛으로 깔끔하긴 한데 그렇게 비싼 값을 받을 일인가 싶다. 대구 수프를 3만 원쯤 받는 걸 보니 갑자기 황태 뭇국이 생각난다. 우리나라 황태 국물이 훨씬 시원할 텐데.


해가 떨어지면서 눈보라가 더욱 심해졌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악몽이었다. 눈보라를 거꾸로 하늘로 솟구치게 하는 강풍이 달리는 차를 마구 흔들어댄다. 순간적인 돌풍이 눈보라를 뿌려댈 때는 화이트아웃 현상으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차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J와 교대하여 운전대를 잡은 후 도로가 좁고 길이 얼어 있어 기어가듯 조심조심 차를 몰던 중, 어느 순간 차가 오른쪽으로 쏠리며 바퀴가 둔덕 아래로 미끄러져버렸다. 거기서 그냥 견인차를 부르면 될 일을 J가 스스로 올라가 보겠다고 차를 앞뒤로 움직이다 앞 범퍼까지 박아버렸다.


지나가던 차들이 사고 난 우리 차를 보고 멈춰 서서 괜찮냐고 물어보긴 하는데 하나같이 렌터카 회사에 연락하라는 말뿐이다. 전화를 걸었더니 30분 만에 긴급 출동 차가 와서 바퀴에 로프를 걸어 구조해 주었다.


주행에는 지장이 없는데 오히려 문제는 깨진 앞 범퍼, 결국 다음날 트롬소까지 하루 종일 차를 몰고 가서 새 차로 교체해야 했다. 슈퍼 커버 보험을 빵빵하게 들어 수리비는 문제없지만 견인비는 포함이 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사람 안 다친 게 다행이다.

이번 겨울 여행에는 사건, 사고가 많기도 하다. 그래도 비교적 평평한 곳에서 미끄러졌길래 망정이지 바닷가나 가파른 곳이었으면 차가 구르거나 더 험악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미끄러지는 사고는 내가, 앞 범퍼는 J가 사이좋게 하나씩 사고를 치고 누구 잘못이 더 큰지 말씨름은 했지만 원인 제공은 분명 내 쪽이다.


밖은 깜깜하고 눈비가 내내 몰아치니 도로는 온통 진창길로 변했다. 겁나는 피오르 해안 길, 오로라 보려다 사고나지 않게 더더욱 조심해야겠다.


로포텐의 오로라는? 로포텐 전체가 짙은 구름 속에 들어가 아예 편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 초기에 오로라를 만난 게 그저 천운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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