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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사미족의 땅, 라플란드

스웨덴의 오로라

by Bora

눈비 내리는 로포텐 제도를 떠나 내륙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노르웨이 항구 도시 나르빅에서 스웨덴의 최북단 도시 키루나까지 3시간, 거기서 스웨덴 땅을 통과하여 핀란드 국경에 가까운 숙소까지 다시 2시간 반이 걸린다. 전날 트롬소에 돌아가서 렌터카를 바꿔 오느라 스쳐 지나간 항구 도시 나르빅에 잠시 들렀다.


나르빅은 생각보다 규모가 꽤 큰 도시였다. 유럽 최대의 철광석 산지인 스웨덴 키루나에서 채굴된 철광석은 부동항인 나르빅 항을 통해 전 세계로 수출된다. 스웨덴이 지척이라 나르빅 역에서 출발한 열차가 자기 나라인 노르웨이 영토를 통과하는 게 아니라 스웨덴의 키루나를 거쳐 수도 오슬로까지 연결되는 것도 흥미롭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히틀러는 스웨덴 철광석을 확보하기 위해 제일 먼저 나르빅 항을 점령했다. 여행 전 넷플릭스에서 본 영화 <나르비크>의 무대가 된 곳이다. 전날 우리가 묵었던 숙소 앞에도 나르빅 전투 기념비가 서 있었다.

시내를 빠져나오면서 바다와 피오르, 깎아지른 산봉우리는 사라지고 너른 평원과 함께 드문드문 호수가 이어졌다. 지도엔 호수로 표시되어 있지만 겨울철엔 눈으로 덮여 그냥 들판처럼 보인다. 내륙으로 접어들며 며칠째 쉬지 않고 내리던 비가 드디어 멎었다. 도로는 눈과 얼음에 덮여 있지만 넓고 평탄하여 달릴 만하다.


노르웨이에서 국경을 지나 스웨덴으로 들어서면 그곳은 사미족의 땅인 라플란드이다. 곧이어 아비스코(Abisko) 국립공원이 나왔다. 아비스코와 근처에 있는 도시인 키루나(Kiruna)는 트롬소와 함께 유럽의 유명한 오로라 관찰지로 알려져 있다. 트롬소에 비해 아비스코와 키루나는 내륙에 있기 때문에 겨울철 날씨가 좀 더 나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비스코에는 캐나다 옐로나이프의 '오로라 빌리지'와 비슷한 개념의 '오로라 스카이 스테이션'이라는 곳이 있다.


아비스코는 국립공원이라서 트레일이 잘 정비되어 있다. 신발에 아이젠을 장착하고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도 제법 보인다. 아비스코를 지나 우리는 스웨덴의 북쪽 끝 도시인 키루나로 향했다.


키루나는 세계 최대의 철광석 산지답게 규모도 제법 크다. 오랜 기간 채굴이 계속되며 도심이 잠식되자 2035년까지 건물을 하나하나 통째로 들어 옮기는 ‘도시 이전’ 계획을 세워 진행 중이라고 한다. 철광석을 캐기 위해 시가지를 이동시키겠다는 발상이 인상적이다.


키루나 시내에서 사미족의 순록 요리를 그들의 전통 텐트 안에서 맛보았다. 순록 가죽으로 만든 사미족 텐트에서 먹는 전통 요리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순록 고기는 양념이 잘 배어 있어서인지 불고기처럼 부드러웠다.


키루나 근교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이스 호텔이 있다. 얼음 객실에 묵으며 객실 안에서 오로라도 볼 수 있다는 최고급 호텔이다. 1박에 천 유로가 넘는 비용을 지불하고 들어가지만, 추워서 정작 잠은 옆의 방갈로에서 잔다고 한다. 호텔 내부까지 들어가려면 5만 원이 넘는 입장권을 사야 하지만, 외부 관람은 자유다.


마침 얼음 호텔 뒤로 노을이 물들면서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졌다. 하늘은 맑게 갰고 군데군데 구름이 퍼져 있어, ‘여기에 오로라만 떠 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하는 상상으로도 마음이 들떴다.


키루나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은 어두웠지만 도로 상태가 좋아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가는 내내 ‘순록 출몰 주의’ 표지판이 수시로 나타났다. "표지판은 있는데 야생 순록이 왜 안 보이지?" 하고 생각하던 바로 그때, 시속 100km로 달리던 차 앞 도로 한가운데 순록이 서있어서 깜짝 놀랐다. 간신히 운전대를 틀어 피하긴 했지만, 자칫하면 큰 사고가 날 수도 있겠다.


우리 숙소는 스웨덴과 핀란드 국경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2020년에 폐교된 중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한 곳이다. 주변에 불빛이 없어 오로라 관측에 최적의 장소다. 만약 오로라가 뜨기만 하면 북쪽을 향해 난 창문 밖으로 바로 오로라를 볼 수 있다.


숙소를 운영하는 로타는 이 학교 졸업생이라고 한다. 여기서 나고 자라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이제 겨우 39세인데 자녀가 무려 아홉 명이다.


오로라는? 거의 매일 볼 수 있다고 한다. 자기 폰에 저장된 멋진 오로라 사진들을 보여주며, 오로라가 뜨면 연락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사방이 캄캄하고 하늘에 별도 반짝이니 다른 조건은 모두 완벽한데, Kp지수가 겨우 1이라 너무 약하다. 북극권의 맑은 하늘 아래 이렇게 낮은 지수라니. 자다 깨다 하면서 수시로 하늘을 확인했지만 결국 그날 밤 오로라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날은 스칸디나비아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여유 있는 날이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 부부의 여행 스타일은 많이 얌전해진 편이다. 젊어서는 무던히도 바쁘게 쏘다녔다. 세상 호기심 많은 J의 여행 스타일에 따라 멋모르는 나는 그저 헉헉대며 따라다니기 바빴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좀 여유 있게, 쉬어가며 여행을 즐기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이번에는 너무 욕심을 부렸다.


겨울철에 다시 오기 어려운 곳이라 여기저기 궁금한 장소를 포함하다 보니 이동하는 시간이 하루 중 절반이나 되고, 얼어붙은 빙판길은 너무 위험했다. 해는 짧은데 눈앞에 보이는 환상적인 풍경을 쫓아다니느라 하루 종일 움직이고 사건사고에 해프닝까지 겹쳐 쉴 틈이 없었다. 남은 일정이라도 천천히 욕심을 내려놔야지 하는 마음이지만 북극권까지 왔으니 오로라는 그래도 봐야 할 텐데 Kp지수가 너무 약하다.


아침에 다시 보는 숙소는 완벽했다. 창을 열면 멀리 회색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숲이 나지막이 펼쳐지며 아늑한 느낌을 준다. 노르웨이의 스펙터클한 해안을 지나와서인지 평온해 보이는 들판이 더욱 반갑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으니 푹 쉬면서 자연과 하나 되어 휴식할 수 있겠다. 밤이면 오로라를 보면서.


우리 숙소가 자리 잡은 쿠타이넨 마을은 국경을 이루는 무오니오강을 사이에 두고 스웨덴과 핀란드에 같은 이름의 마을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흥미로운 곳이다.


평소에는 보트로 강을 건너면 되지만 차를 가지고 갈 경우 크게 돌아 다리를 건너야 하므로 거의 40분을 달려야 한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강이 얼어붙어 차로 1분 만에 갈 수 있다.


동네를 다녀보면 북극권 마을 풍경이 정겹기만 하다. 강 건너 핀란드 쿠타이넨 마을에 있는 순록 농장까지 눈길을 걸어가 봤다. 자전거 대신 스노모빌, 장바구니 대신 썰매를 끌고 다니는 동네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오랜만에 산책을 즐겼다.


구름 가득하던 하늘이 저녁이 되자 깨끗하게 맑아졌다. 그러나 Kp지수는 2, 별로 좋지 않다. 저녁을 먹고 있는 도중에 로타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식사 중이네. 어쩌나? 오로라가 떴는데...“

식당에서 동쪽 창밖만 확인했는데 북쪽 하늘에 오로라가 뜬 것이다. 서둘러 차를 몰아 사방이 트인 무오니오강으로 갔다. 얼어붙은 강 한가운데, 스웨덴과 핀란드 국경 위에 차를 세웠다.


지평선 위로 나지막한 초록빛 선이 제법 선명하다. 그러나 불과 몇 분 만에 스르르 옅어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다시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 하지만 그날 더 이상의 오로라는 없었다.

오로라 앱에는 각 지역의 실시간 웹캠 영상이 올라온다. 오로라를 기다리며 다른 지역의 오로라 상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영상들이다. 신기하게도 이날 뜬 오로라가 스웨덴의 키루나와 아비스코에서도, 노르웨이의 트롬소에서도 거의 같은 모양으로 관측됐다.


하늘 높이 뜬 것도 아니고 땅에 붙어 낮은 아치를 그리다 곧 사라졌는데, 어떻게 똑같은 모양의 오로라가 관측됐을까.

짧은 한 번의 등장으로 끝났어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지. 위안을 삼으며 핀란드의 오로라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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