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오로라 (2)
핀란드 라플란드의 북쪽 끝으로 달렸다. 북위 67도에서 69도까지, 무려 2도나 수직 이동이다.
이제는 이름도 친숙해진 사리셀카(Saariselka)와 이발로(Ivalo), 이나리(Inari)를 지나면서 마을 구경도 잘했다. 핀란드의 오로라를 검색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지명들이라 궁금했는데, 우리가 지나가는 길에 다 모여있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사리셀카는 우리나라 용평과 같은 스키 리조트 마을이었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어찌나 눈이 많이 쌓여있는지 과연 스키장을 할 만한 곳이로구나 싶다. 마을을 다니는 사람들의 복장은 모두 스키복 스타일이다.
길을 가다 보면 이동 수단으로 설상 자전거와 노르딕 스키, 눈썰매가 일상인 예쁜 마을이다. 숙소는 용평처럼 고급 리조트와 호텔만 즐비하다.
이발로(Ivalo)는 마치 용평 입구에 자리 잡은 횡계처럼 사리셀카 스키장의 근거지 역할을 하는 마을이다. 공항은 물론 필요한 상점도 다 있다. 이쪽 동네들은 오로라를 보기에 무척이나 좋은 조건이라 어디서든 오로라 투어 광고가 빠지지 않는다.
이나리(Inari)는 '사미 문화의 중심지'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나리에서 할 거라고는 대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일 밖에 없다. 주변의 관광 명소를 찾아보면 1위 사미족 박물관, 2위 사리셀카 스키장, 나머지는 국유림, 산봉우리, 순록농장 등이다. 거대한 이나리 호수를 끼고 있는 이 마을 이름이 나는 정겨웠다. 마치 수유리, 미아리 옆에 있는 동네 같다.
오늘 우리가 자는 숙소가 있는 동네 이름인 무오트칸 루오크투(Muotkan Ruoktu)에 비하면 얼마나 발음도 부드러운가.
3시밖에 안 됐는데 날은 어두워지고 전나무 숲 위로 정월 대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른다. 가는 내내 길잡이가 되어준 보름달. 서울의 지인들로부터 대보름 나물과 오곡밥 사진이 연신 카톡으로 날아온다. 서울 하늘이 흐려서 보름달 보기가 어려웠다는 뉴스를 보며 비록 나물 반찬 하나 없이 빵만 뜯어먹을지언정 여기서 보름달을 보게 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침엽수림 사이로 살짝살짝 나타나는 보름달을 보고 J가 서로 소원을 빌자며 나보고 먼저 얘기하라고 한다. "당신의 건강!" 이번에는 그의 차례다. "화려하고 멋진 오로라를 보게 해 주소서!“
그래. 내가 아프면 J를 부려먹을 수 있는데 J가 아프면 내가 엄청 불편하니 넘어가자.
이나리 마을 외곽의 숙소는 이번 여행 최악이었다. 지금까지 가는 곳마다 줄곧 숙소 운이 좋더니 제대로 이상한 곳을 만났다. 숙박비가 (다른 곳에 비해) 좀 저렴한 편이라 불안하긴 했지만 리뷰가 좋아 예약했는데.
일단 화장실이 문제다. 공동 화장실이란 건 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 공동 화장실이 바깥으로 나가 미끄러운 얼음으로 뒤덮인 길을 지나가야 할 줄이야. 화장실 한번 가려면 부츠에 아이젠까지 착용을 해야 하니 준비 과정이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공용 주방도 이런 형태는 난생처음이다. 부엌까지 아이젠 차림으로 중무장하고 가는 건 받아들인다. 그런데 주방에 물이 없다! 상하수도, 싱크 자체가 없어 물을 쓰려면 50m 떨어진, 물이 나오는 건물까지 가야 한다. 주인이 생각이란 게 있는 건가?
방 앞은 완전 얼음판이라 드나들 때마다 조심조심 엉금엉금 걸어가야 한다. 이탈리아에서 한 차례 넘어지면서 팔이 부러져 골절수술까지 받은 지 한 달 조금 넘었는데 또 넘어지면 큰일이다. 이번 여행 내내 내가 얼마나 조심하며 다녔는데!
"이런 곳에서 계속 묵을 순 없어. 내일 아침 불편 사항을 얘기하며 (안 되겠지만 일단) 환불을 요구해 보고, 환불이 안되더라도 다른 곳으로 옮길래. 여기 있다가 다시 넘어지면 어떡해!“
나는 씩씩거리며 대체 숙소를 찾았다. 노르웨이 최북단 도시 알타 근처로 갈까? 날씨부터 봐야지. 내일 그쪽은 눈이 온다. 눈이 오는 곳을 향해 일부러 갈 수는 없지. 우리가 지나쳤던 이나리 호숫가 산장에 전용 욕실이 포함된 방이 있다. '인기가 많아 평소에는 예약이 어려운 숙소'란다. 이나리 호수 근처라면 내일 날씨도 괜찮다. 온 길을 한 시간 이상 되돌아가야 하지만 그까짓 것쯤이야.
대충 저녁을 해치우고 밖으로 나왔다. Kp지수는 2.33이지만 오로라 권역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주차장 쪽으로 걸어 나오는 순간 하늘에 오로라가 보인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과 경쟁이라도 하듯 바로 강렬하고 진한 오로라가 동으로 서로 북으로 각기 나오다가 이어진다. 다섯 갈래 오로라 띠가 동에서 서로 이어졌다.
20분쯤 정신없이 춤을 추다 잠시 쉬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동쪽 하늘 보름달 위로 솟아오른다. 보름달과 오로라의 환상적인 조합이다. 오로라가 주로 머리 위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고개를 계속 90도로 꺾어 하늘을 쳐다보자니 어질어질하다.
전나무 숲 위의 오로라는 횃불처럼 초록 불빛을 올리다가 어느 순간 파르르 떨며 춤을 춘다. 이날의 Kp지수는 3까지밖에 오르지 않았지만 앞에서 보았던 센 오로라보다 강도가 결코 낮지 않았다.
이전 이틀간 이 비슷한 지수에서 너무나 희미한 오로라만 살짝 본 걸 생각하면 북위 69도 지역으로 올라왔기 때문인 건지 당최 종잡을 수가 없다. 이런 예측 불가성 때문에 더욱 오로라의 마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나 싶다.
이 숙소 주변은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눈길을 걷다 보면 전용 욕실이 딸린 캐빈형 숙소가 꽤 보인다. 숙박비는 세 배지만 그런 곳에 머물며 오로라 보기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이틀에 백만 원의 숙박비? 이런 오두막을? 난 그렇게는 못 하겠다.
오로라를 본 후 마음이 풀어져서 숙소를 바꾸지 않고 그냥 하루 더 버티기로 했다. 어제 오로라가 떴다고 우리 방까지 알려주러 온 케빈, 밤에 방 앞의 얼음에 미끄럼 방지용 흙을 뿌려준 킹가에 대한 고마움도 한몫했다.
결과적으로는 이곳에서 하루 더 있기를 잘했다. 둘째 날도 오로라가 찾아와 줬다. 전날보다는 약하지만 동쪽 하늘에 넓고 굵게 솟아올라 북쪽 하늘까지 움직이며 한참을 머물렀다. 마치 아치형 해안선에 파도가 드나들 듯 넓어졌다 좁혀졌다 하면서.
30분쯤 오로라를 감상하다 세기가 약해지면서 소강상태를 보이길래 추워진 나는 먼저 들어왔다. 옷을 막 갈아입자마자 J가 나를 불러댄다.
"나와 봐. 오로라가 다시 춤을 춰." 앱으로 확인해 보니 현재 지수가 1.67. 얼마나 오래갈까 싶기도 하고 다시 옷을 껴입기도 귀찮아 버텨본다. 실제로 더 이상 힘을 못 쓰고 사라져 버렸다.
갈수록 꾀가 나는 걸 보면 이제는 배가 부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