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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라플란드의 관문 로바니에미

핀란드의 오로라 (1)

by Bora

스웨덴에서 동쪽으로 핀란드를 향해 달렸다. 넓은 길은 하얀 눈으로 덮여 있고 도로변 둔덕과 그 너머까지 모두 새하얗게 이어져 어디가 도로이고 어디가 아닌지 구별조차 어려운, 그저 온통 눈 세상이다.


출발할 무렵 도로 옆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보여 위험하다 했는데 좀 더 달리자 길 한 복판에 누가 서 있다.

'큰일 나겠네. 왜 저러고 있지?‘ 하면서 자세히 보니 순록이다. 차가 다가가자 얼른 눈 둔덕을 넘어 숲으로 사라졌다. 순록은 뿔도 자태도 우아하고 점잖다.


곧이어 순록 가족을 만났다. 열 마리가 훌쩍 넘는 야생 순록들이 길을 점령하고 한가롭게 모여 있다. 멀찍이 차를 세우고 천천히 접근해 봤다. 10여 미터 거리까지 다가가자 모두 몸을 돌려 홀연히 도로를 빠져나간다.


순록과 경주도 해봤다. 도로 한가운데 서 있던 순록 한 마리가 차를 보더니 도로변을 따라 열심히 달린다. 10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천천히 따라가 봤다. 뒤따르는 우리를 살피랴, 도로 옆 눈 둔덕 중에 넘을 만한 야트막한 곳이 있는가 찾으랴 도리도리 고개가 분주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순록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핀란드에 예약해 둔 숙소는 두 군데, 그중 한 곳은 남쪽으로 꽤 내려가 ’산타 마을‘로 알려진 로바니에미 근교 숲 속의 외딴 산장이다. J는 너무 남쪽에 숙소를 잡았다며 위도가 낮아 오로라를 못 볼까 봐 계속 걱정했다. 북위 67도 근처이므로 북극권에는 속하지만 오로라 오벌에서는 살짝 벗어나 있어, Kp지수가 최소 3 이상은 되어야 확률이 있기 때문이다.


오후 늦게까지 구름이 잔뜩 끼고 Kp 지수도 낮아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5시경 스마트폰에 알람이 떴다.

'날씨가 좋다면, 1시간 후에 오로라를 볼 수 있습니다.'

서둘러 저녁을 먹으며 실시간 상황을 확인했다. Kp지수가 3으로 괜찮은 편이지만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하다. 오로라 앱의 구름 지도를 보면 숙소 북쪽은 두터운 구름대, 남쪽은 살짝 갠 하늘, 우리 위치는 딱 경계선에 있다. 그렇다면 청명한 하늘을 찾아가야지 뭐. 우린 명색이 오로라 체이서 아닌가.


급하게 차를 몰고 남쪽 방향으로 내려갔다. 30분쯤 달렸을까? 구름이 점점 없어지고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Kp지수도 올라가는데, 정작 하늘에는 오로라의 기척이 전혀 없다. 오로라를 보기 좋은 포인트를 찾아 거의 두 시간을 헤맸으나 오로라가 나타나지 않아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상하네. Kp지수는 4까지 올라갔고 하늘도 맑아졌는데 이럴 수도 있나?'

테라스에 나가서 하늘을 올려다봐도 어둠 속에 달과 별만 반짝인다. 그저 한숨만 쉬다가 포기하고 잘 준비를 했다.


그때 숙소 문을 두드리는 소리, 직원이 '오로라가 떴다'고 알려준다. 밖으로 나가자 머리 꼭대기에 오로라가 펼쳐져 있다. 서둘러 옷을 갖춰 입고 사방이 탁 트인 숙소 앞 눈에 덮인 호수로 나갔다. 이곳에 묵고 있는 모든 게스트들이 호수에 나와 있다. 스위스 커플도, 터키 부부도 오로라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며 신이 났다.


갑자기 동쪽 지평선에서도 오로라가 나타났다. 가늘지만 초록빛이 선명하다. 이곳저곳에서 조금씩 빛줄기가 나타나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동쪽과 서쪽 하늘에서 동시에 오로라가 솟아오른다.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듯 하늘을 가르며 퍼져 나간다. 정월 대보름이 가까워져서인지 달은 크고, 눈 덮인 호수는 마치 대낮처럼 밝았다. 달과 어우러진 오로라는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아름다웠다.


원래 보름달이 뜨면 달빛이 강해 약한 오로라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날의 최고 Kp지수는 4.67, 이번 여행 초기에 보았던 내 인생 최고의 오로라 때보다도 더 높았다. 오로라 앱에서도 우리가 있는 지역이 빨간색으로 선명하다. 지도의 빨간색은 오로라가 매우 강력하다는 뜻이다.


Kp지수의 변화는 참으로 흥미롭다. 나는 처음에 한 번 발표된 지수는 하루종일 그대로 유지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계속 관찰해보니 불과 몇 시간, 몇십 분 사이에도 지수가 순식간에 솟아올랐다가 곤두박질치며 요동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날 오전 11시에 1.33에 불과하던 지수는 등락을 거듭하면서 상승세를 타다가, 최고 4.67까지 오르며 로바니에미 일대 하늘에 장대한 오로라를 드리웠다.


구름과 어우러져 흐릿하게 번지는 오로라도, 숙소 뒤에 솟아오르는 오로라도, 전나무숲 위에 떠오른 오로라도 제각각 다른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사진으로 담아내면 보름달빛이 눈에 반사되어, 마치 대낮에 오로라가 뜬 것처럼 밝게 보인다.


하지만 지난번과 같은 압도적인 클라이맥스는 없었다. 호수 위 하늘에서 화려하게 펼쳐지다가 어느 순간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한 시간 넘게 설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오로라의 다채로운 우주쇼를 감상할 수 있었다. 바다 위에서 본 오로라와는 또 다른 장관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같은 모습이 없는 오로라, 바로 이것 때문에 나는 다시 오로라를 찾아나선다.


다음 날은 로바니에미와 산타 마을을 찾아가기로 했다.

노르웨이와 핀란드, 스웨덴 내륙의 북쪽 지역을 통틀어 라플란드라고 부른다. 북극권의 황야와 오로라, 여름철 백야로 유명한 곳이며, 예로부터 순록을 유목해 온 사미족의 고장이기도 하다. 라플란드 지방의 이정표에는 사미어가 반드시 병기되어 있다.


핀란드 사람들은 로바니에미를 '라플란드의 관문'이라 부른다. 실제로 가 보니 도시 규모가 상당하다. 현대적인 빌딩이 들어서 있고, 시내와 쇼핑가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겨울철 로바니에미는 오로라 투어와 산타클로스 마을이 주된 관광 상품으로 자리잡고 있는 듯했다.


'산타클로스 공식 거주지'로 공인된 산타 마을은 로바니에미에서 약 7km 떨어져 있다. 북쪽으로 이어지는 국도의 북극권이 시작되는 지점(북위 66도 33' 44")에 북극권 표지가 세워져 있었는데 1985년 표지판 근처에 테마파크를 조성한 것이 산타 마을의 출발점이었다.


이곳에는 산타 우체국, 사미족의 순록 썰매 체험, 산타 기념품점 등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로 꾸며진 시설들이 다양하게 자리하고 있다. 규모는 우리나라 에버랜드에 훨씬 못 미치지만, 마을 전체를 붉은색으로 장식해 사진 찍기에 좋고, 산타의 환상을 현실화해 놓아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다.


다음 날 낮에는 숙소 앞 트레일을 따라 걸었다. 인적 하나 없는 새하얀 길이 고요하게 이어졌다. 트레일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눈이 60-70cm나 쌓여 있어 그대로 푹푹 빠져버린다. 전나무와 자작나무 사이로 어디선가 뾰로롱 새소리가 울려퍼진다. 끝없이 펼쳐진 눈세상 속에서 생명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토끼일까, 다람쥐일까, 작은 동물의 발자국만 이어져 있을 뿐, 넓은 세상에서 인간이라고는 오직 둘 뿐인 길을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를 내며 마냥 걸었다.


로바니에미 근처의 숙소에서는 사흘 동안 머물렀다. 첫날은 기대하지 않다가 뜻밖에도 화려한 오로라를 봤는데 둘째 날은 새로운 태양풍이 도착했다는 소식과 함께 Kp지수가 4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구름이 하늘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저녁 7시, '1시간 후 오로라를 볼 수 있다'는 알람이 떴지만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다. 밤 11시가 되어 구름이 조금 걷히자 지치지도 않는 J는 오로라를 맞으러 나가야겠단다. 나도 뒤따라 나섰지만, 오로라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희미한 녹색 띠만 하늘 이곳저곳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한순간 짙게 솟아오르는가 싶다가 이내 스러졌다. 그날 밤 새벽 1시까지 하늘만 바라보다 결국 숙소로 들어왔다. 그다음 날도 똑같은 상황의 되풀이.


Kp지수는 결국 극지방의 자기량을 계량화한 수치일 뿐, 지수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오로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하늘의 섭리는 인간의 영역이 아님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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