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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유럽 대륙 꼭대기에서 밸런타인 오로라를 만나다

노르웨이의 오로라 (4)

by Bora

2월 14일 G급 폭풍이 몰아칠 것이라는 예보가 속보로 전해졌다. 태양 흑점에서 방출된 플레어의 규모가 일정 수준을 넘어 지구 자기장을 교란시키게 되면 그것을 '폭풍'이라 부른다. 태양 폭풍(Solar Storm)에는 여러 등급이 있는데 G급은 규모가 작은 것이고, 그 위로 M급과 X급이 있다. 어쨌든 폭풍은 폭풍이다.


태양 흑점 폭발 이틀 후, G급 폭풍이 극지방을 강타하는 날 우리는 노르웨이 최북단 도시인 알타(Alta)로 간다. 스페이스웨더닷컴에서는 태양풍이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에 지구에 도착하게 되었다고 이번 오로라에 '밸런타인 오로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원래 계획은 이나리에서 핀란드 남쪽으로 내려갈 계획이었지만 코스를 틀어 반대 방향인 북쪽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노르웨이 북쪽 해안선을 따라 트롬소로 돌아가도 동선이 괜찮을 것 같아 선택한 곳이 바로 알타(Alta). 북쪽 바렌츠 해 연안의 피오르를 보고 싶기도 하고 J가 오래전부터 ’오로라 포인트‘로 찍어둔 곳이기도 하다.


알타는 (인구 만 명 이상 규모의 도시 중) 지구 최북단 도시이다. 발음하기도 좋고 라틴어로 ’높은 곳‘이라는 뜻도 마음에 든다. 알타에 도착하는 날 G급 폭풍이 만들어내는 밸런타인 오로라를 볼 수 있다니 달려가는 길도 신이 날 수밖에.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일기예보를 확인한 결과 오후부터 알타 일원에 눈이 온다는 것이다. 내륙 고원과 달리 해안선에 접한 알타는 강수량이 많은 곳이라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내륙에 있으면 문제없이 밸런타인 오로라를 보게 될 걸 괜히 장소를 옮겨가지고.' 하며 후회하다가 지도를 펴놓고 연구하여 해결책을 찾아냈다. 해안선까지 내려가지 않고 알타 남쪽의 내륙에서 오로라를 보는 것이다. 알타의 남부 고원지대는 건조하여 날씨가 좋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마침 우리가 알타를 찾아가는 길에 고원 지대 마을 메이즈(Masi)를 지난다.


핀란드 국경을 넘어 노르웨이로 들어서자 너른 평원이 끝나고 구불구불한 산길이 나타났다. 북쪽 방향으로 고원 지대를 한참 달리다 마치 대관령에서 강릉으로 내려가는 것처럼 한 시간을 아래로 내려가면 그 끝 바닷가에 알타가 있다.


알타에 일찍 도착하여 호텔에 체크인을 한 후 다시 온 길을 되돌아가 메이즈 마을로 돌아가야지 하고 있었는데 일기예보가 변해서 알타의 하늘도 흐림이 맑음으로 바뀌었다. 아름다운 피오르 해안을 배경으로 오로라를 찍고 싶었던 J는 '역시 오로라 보기에는 바다가 최고야'를 연발하며 좋은 포인트를 찾아 나섰다.


저녁에 찾아간 라타리(Lathari) 해안은 알타 시내에서 12km 떨어진 곳이다. 불빛도 전혀 없고 유빙이 둥둥 떠 있는 해변은 사방이 트여있어 오로라 관측에 최적의 장소다.


다음날부터 귀국할 때까지 알타도, 트롬소도 계속 눈 예보만 있다. 이날 밸런타인 오로라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오로라가 될 것 같은 예감 속에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됐다. Kp 지수도 높고, 오로라 지도의 빨간 영역 속 가운데에 알타가 들어가 있다. 강렬한 오로라가 터질 확률이 매우 높다는 지표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게 이 좋은 조건에서 오로라는 아주 약하게 나왔다가 사라지기를 몇 번 하다가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 카메라를 대보면 하늘에 초록색은 있지만 곧 시작될 듯하다가 파르르 사그라드는 시시한 오로라가 얼마나 계속되던지.


차에서 졸며 깨며 두 시간을 기다렸다. J는 오늘이 마지막이다 싶어서인지 계속 다른 지역의 실시간 오로라 웹캠을 찾아보다가 차 밖으로 나가 하늘 올려다보기를 반복하며 한시도 쉬질 않는다. 비몽사몽 졸고 있던 중에 '오로라다!'라는 그의 외침이 들렸다.

드디어 알타 시가지 위로 오로라가 횃불처럼 용솟음치며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넓게 퍼지며 흘러간다.


오로라가 출렁이며 보름이 막 지나 이지러지기 시작하는 달 쪽으로 흐르다 아래쪽으로 길게 너울을 드리운다. 한 겹, 두 겹, 세 겹.


밸런타인 오로라는 모양도 나타나는 방향도 모두 새로웠다. 남쪽 하늘까지 여기저기 게릴라처럼 출몰하다 얼음 바다 위에서 달빛과 오로라의 환상적인 향연으로 끝났다.


30분을 춤추던 오로라가 조금씩 사그라든다. 좀 더 길게 보여줘도 좋았겠지만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북빙해의 오로라로 마무리된 우리들의 스칸디나비아 오로라 여행.


다음날 아침 호텔 식당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어젯밤 오로라 봤어? 난 해변 도로에서 봤어. 난 시내에서 봤어"라고 행복한 얼굴로 각자의 오로라 경험을 자랑한다.


'중급 강설 경보'가 발령된 일기예보가 얼마나 정확한지 밤새 약하게 내리던 눈은 아침이 되자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눈을 맞으며 알타 시내를 구경하기로 했다. 알타에는 오로라 성당(Cathedral of the Northern Lights)이 있다. 오로라를 형상화한 현대적 외관이 인상적이다. 그 위로 오로라가 뜨면 정말 환상적이겠다.


오후에는 하얀 눈 속에 그림 같은 풍경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알타 피오르를 따라 걸었다. 눈이 계속 쌓이지만 그 밑은 빙판이라 조금만 방심하면 발이 미끄러진다.


발끝을 조심하며 선사시대 암각화가 전시돼 있는 알타 뮤지엄까지 걸었다. 오랜 옛날 이 대륙의 북쪽 끝에서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를 직접 보고 싶었지만 눈에 덮여 볼 수가 없었다.


끝났다고 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오로라 쫓기. 알타의 마지막 밤은 짙은 눈구름 속에 아쉬움과 함께 끝났다.

환상적인 밸런타인 오로라의 기억만을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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