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1. 마지막 선물과도 같았던, 트롬소의 오로라

노르웨이의 오로라 (5)

by Bora

이번 북유럽 오로라 여정의 끝자락은 노르웨이 트롬소다. '그래도 유럽 오로라의 수도를 보고 가야지' 싶어 트롬소에서 마지막 이틀을 묵기로 했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알타에서 트롬소를 향해 출발했다. 잠시 갰다가 다시 눈발이 날리는 등 변화무쌍한 날씨 속에서도 다행히 바람이 세지 않아 주행은 힘들지 않았다.


알타에서 트롬소로 가는 길은 피오르를 끼고 이어지는 바닷길이다. 알타피오르를 시작으로 굽이마다 다른 피오르가 이어졌다. 산을 하나 넘으면 또 다른 바다, 설산과 해변이 중첩되는 장대한 풍경이 로포텐의 아기자기함을 부풀려 놓은 듯했다.


피오르가 연결되는 사이사이 산악지대를 지날 때면 하얀 눈옷을 입은 침엽수림이 줄을 지어 양옆에 도열을 했다. 저 멀리 깎아지른 설산을 보면 히말라야에 온 듯한 착각도 불러일으킬 정도다.


피오르의 아름다움에 빠져 구경하며 설렁설렁 가느라 아침 먹고 바로 출발했는데도 저녁 6시 넘어서야 트롬소 시내에 도착했다. 숙소는 시내에서 40km 떨어진 곳이다.

트롬소 시내를 통과하여 북쪽 해안 길을 달렸다. 하루 종일 눈 예보였기에 전날 밤 알타에서 본 오로라가 이번 여행의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다. 오로라에 대한 기대를 접고 트롬소에 들어섰는데 구름은 많지만 눈은 내리지 않는다.


숙소를 10km쯤 남기고 갑자기 남쪽 하늘에 오로라가 떴다. 강렬하게 한 줄로 바다에서부터 하늘까지 솟아오른 오로라는 바다에 반사된 초록빛이 유난히 또렷했다. 서둘러 주차할 곳을 찾느라 헤매는 사이 벌써 처음의 강렬한 빛은 사그라들었다.

그래도 오로라는 모습을 바꿔가며 밤하늘에 뻗어나갔다. 구름이 워낙 짙어 달은 구름 속에 가려지고 그 틈을 타서 별빛이 반짝인다.


한 줄로 굵게 뻗어나간 오로라 안으로 별들이 들어갔다. 별들이 오로라 속에서 반짝인다. 짙은 구름 사이로 스며 나오는 오로라는 힘겨워 보였다.


곧이어 눈발이 흩날린다. 눈 내리는 하늘에서 별과 오로라는 함께 빛났다. 연한 소용돌이를 만들다가 하늘의 별들을 모두 품겠다는 듯 넓게 퍼지며 품 안에 모은다.


10분쯤 지났을까. 우리가 차를 세운 공터에 다른 차들이 한 대씩 모여든다. 조금 있다가 오로라 투어버스도 왔다. 카메라와 삼각대를 갖춘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서 오로라를 촬영하느라 바쁘다. 30분쯤 지나자 희미해지며 짙어진 구름 뒤로 사라져 버렸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받은 선물과도 같은 오로라. 트롬소에서까지 오로라를 보게 되다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


우리가 트롬소에서 묵은 숙소는 3주 전 트롬소에 도착한 날 묵었던 바로 그 집이다. 우리와 같은 날 도착했던 로잘린이 여전히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방금 오로라 봤어?“

"그럼, 물론이지!“

반가운 인사를 나눈 후 그동안 오로라를 몇 번이나 봤는지 물어봤다. 네다섯 번 봤단다.


우리는 같은 기간 동안 강렬한 오로라만 네 번, 약한 것까지 치면 거의 반타작에 가깝게 오로라를 만났으니 확실히 운이 더 좋았다. J는 운도 중요하지만 부지런히 찾아다니고 끈질기게 기다린 덕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 하긴 그 말도 맞다.


다음날은 트롬소 시내를 산책했다.

12년 전 쏟아지는 눈보라 속에 스치듯 들렀을 때의 씁쓸한 기억만이 남아있던 트롬소 시내는 주민들과 관광객들로 활기차다. 함박눈과 진눈깨비가 오다 그치다를 반복하며 길은 얼음과 눈으로 미끄러웠지만 어느 정도 적응이 되니 다닐 만하다.


구시가의 트롬소대성당 주변에 보행로가 이어지고, 멋진 상점들이 줄지어 모여 있다. '북극권의 파리'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곳이다. 부두에서 반가운 후티루튼 배도 만나고 12년 전 촬영했던 사진 속의 장소도 다시 찾아봤다.


트롬소는 섬이다. 육지와 섬을 잇는 트롬소 다리를 건너 북극대성당(Arctic Cathedral)까지 걸었다. 노르웨이의 성당들은 현대적인 감각이 살아있다. 다리에서 내려다보는 항구 풍경도 일품이다.


우리의 오로라 여행 마지막 밤은 시내에 좀 더 가까운 에어비앤비형 주택에서 보냈다. 트롬소는 겨울이 성수기라 3월까지 예약이 차 있단다. 주인 스타브로스는 오로라 투어를 직접 운영하고 있다. 주차와 교통 위반에 대한 경고를 해주며 자기 손님의 99%가 딱지를 끊었다고 조심하라는 당부를 거듭한다. 트롬소는 섬이기 때문에 특히 주차위반과 속도위반을 엄격히 단속한다고 한다. 나중에 범칙금 통지서가 오지나 않을까 불안해진다.


마지막 밤이라 펼쳐놨던 모든 짐을 꺼내고 가방을 다시 꾸리는 와중에 J가 급하게 창문을 두드린다. 오로라가 다시 뜬다고.

6시 조금 넘었을 뿐인데 여기는 오로라가 일찍도 나온다.

"가방 챙길 틈도 없군." 구시렁거리며 (이런 배부른 투정이라니!) 급하게 차를 몰아 시야가 열린 곳을 찾아 나섰다. 공터라고는 길 옆 버스정류장만 보이는데 단속 때문에 겁이 나서 차를 세울 수가 없다. 10분쯤 달려 한적한 주차장 앞 공터를 찾았다. 귀신같이 알고 이미 다른 차들이 서너 대 서 있었다. 동쪽에 오로라가 뿌옇게 올라왔다. 뿌연 오로라라니 흠.


구름은 많은 편이지만 하늘에 별들도 반짝이고 분위기는 좋다. Kp지수도 3.33로 낮지가 않은데 오로라는 당최 힘을 못 받는다. 한참을 기다리다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투숙객 셋을 데리고 오로라 투어에 나선 숙소 주인은 밤늦게까지 돌아오지를 않는다.


다음날 아침에 전날 오로라 투어에 나섰던 투숙객들을 만났다. 어젯밤 오로라가 환상적이었단다. 언제쯤 세게 나왔냐니까 9시부터 밤늦게까지 좋았다고. 가방을 다 챙긴 후 우리가 자려고 누웠던 시간이다. Kp지수가 괜찮더니 어제의 오로라는 밤늦게야 뒷심을 발휘한 모양이다.


오로라 투어에 나섰던 옆 방 사람이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는데 구름 잔뜩 낀 하늘 사이로 짙은 오로라가 보여 아주 멋지고 색다른 분위기였다. 아까워라! 역시 현지에서 오래 산 사람들이 시간과 포인트를 잘 알고 있구나 싶다.


J가 더욱 아쉬워하며

"그러게, 오로라는 끈기야. 부지런해야 한다니까. 어젯밤 나갈까 했지만 너무 피곤해서 쉬었더니 마지막을 놓쳤네." 한다.


그만하면 많이 봤지. 인생 최고의 오로라를 포함해, 원 없이 가슴에 담았다.

선물처럼 찾아온 전날의 오로라도 고맙기만 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