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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가을의 아이슬란드 오로라를 찾아

아이슬란드의 오로라 (1)

by Bora

어쩌다 보니 올해는 북유럽 오로라 여행으로 한 해를 시작했는데, 가을에 또다시 오로라를 보러 가게 됐다.


아들이 공항철도역까지 데려다주며 묻는다.

“이번엔 어디야?” (사실 얘는 우리가 어디 가는지에도 별 관심이 없다.)

“아이슬란드.”

“거기 갔었잖아.”

“오로라 보려고.”

“오로라 봤잖아. 대체 왜 또 가는 거야?”

“아이슬란드에서 가을 오로라는 못 봤거든. 이번 극대기가 지나면 앞으로 십 년은 보기 어렵다니까.”


나는 지금껏 겨울 오로라만 보았다. 겨울은 밤이 길어 오로라를 찾아다니기엔 좋지만, 불편한 점이 훨씬 많다. 추워서 준비할 것도 많고, 북유럽과 아이슬란드의 겨울 날씨는 워낙 험해 허탕을 치는 날도 잦다. 그렇다면 가을 오로라는 어떨까?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 무렵, 그 시기의 오로라가 그렇게 좋다던데.

우리 부부의 문제는, 한쪽이 바람을 잡으면 다른 한쪽이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여행만큼은 둘 다 ‘못 먹어도 고’라는 점이다. 결국 일단 항공권만 구매했다. ‘그 사이 무슨 일 생기면 취소하지 뭐.’ 하면서. 실제로 취소한 적도 아주 가끔 있긴 하다. 그렇게 표를 샀던 게 작년 11월 말이다. 이제는 여행 준비도 대충 해놓고 겁 없이 움직인다.


십여 년 전, 한겨울 일주일 렌터카 여행을 했을 때는 눈비 섞인 강풍 때문에 트레킹은 엄두도 못 내고, 오로라도 거의 보지 못해 한숨만 나왔었다. 그저 다른 행성에 와 있는 듯 황량한 풍경의 기억만 남아 있다.


이번엔 다르다. 이번에는 환상적인 아이슬란드의 구석구석을 내 발로 걷고 싶었다. 그래서 사륜구동 차량만 들어갈 수 있는 내륙 인랜드까지 가보기 위해 렌터카도 4WD로 빌렸다.


노르웨이에서 인생 최고의 오로라를 만난 이후로, 오로라에 대한 간절함은 많이 줄었다. 이제는 아이슬란드의 독특한 풍경을 즐기다, 예보가 좋은 날 오로라를 만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J는 조금 다르다. 최고의 오로라를 카메라에 담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 여전히 욕심이 크다. 낮에는 트레킹과 관광을 하다 보면 밤에 오로라를 쫓기 힘들 것 같다면서, 오로라를 우선순위에 두자고 한다. 그래, 물 흐르듯 순리대로 하자. 그렇게 구석에 넣어두었던 오로라 앱을 다시 바탕화면 위로 꺼내 놓았다.

그나저나 아이슬란드 물가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올해 초만 해도 1,400원대였던 유로 환율이 1,600원을 훌쩍 넘어 버렸다. 유로와 함께 아이슬란드 크로나 환율도 올라 더 비싸게 느껴진다. 이번 여행에서는 욕실이 딸린 쾌적한 호텔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미 가장 강렬한 오로라를 온몸으로 마주한 적이 있기에, 이번에는 큰 욕심이 없다. 지난번엔 스치듯 지나가며 이미지로만 남았던 아이슬란드의 땅을 이번에는 구석구석 밟아보고, 기회가 된다면 몇 번쯤 오로라를 다시 만나보고 싶을 뿐이다.


오로라 예보와 날씨 상황에 맞춰 움직이기 위해 일부러 첫날 숙소만 예약해 두었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가을 오로라를 민날 시간이 다가왔다. 런던을 경유해 레이캬비크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몸과 마음을 다시 오로라 체이서로 리셋해 본다.

오로라 초보 시절, 아무 준비 없이 아이슬란드를 찾던 때와는 달라졌다. 이제는 아이슬란드에 특화된 여러 유용한 앱들이 있다. 오로라 앱은 물론, 변화무쌍한 날씨를 알려주는 Vedur 앱, 그리고 도로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Safe Travel 앱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일주일 내내 맑던 날씨가 우리가 도착한 다음 날부터 연일 비 예보로 바뀐 것이다. 오로라 앱에 따르면, 우리가 머무는 2주 동안 KP 지수가 4 이상으로 오르는 날은 단 세 번뿐이다. 게다가 앞으로 일주일간 비가 계속된다 하니, 오로라를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문득 ‘욕심’이라는 게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결국 만족을 좇는 마음 아닐까. 쉽게 얻을 수 없을 때 간절함이 깊어지고, 그 간절함이 충족되는 순간 더 큰 행복이 찾아오지만, ‘이제 충분하다’고 느끼는 그때부터 간절함은 서서히 사라진다.


날씨가 비관적으로 바뀔수록, 오로라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은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드디어 오로라를 만났다. 아이슬란드에서 다시 맞이한, 12년 만의 재회였다.

처음엔 구름인가 싶었다. 희뿌연 빛이라 구분이 어려워 휴대폰으로 찍어보니, 사방이 오로라였다. 붉은빛이 섞인 오로라가 하늘 군데군데 피어오른다. 너무 약해서 맨눈으로는 흐린 구름처럼만 보여 아쉬웠다. 그러나 잠시 후, 구름처럼 희뿌옇던 것들이 점점 진한 초록으로 변하며 부드럽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진하지는 않지만 붉은빛이 은은히 섞여 있다.


드디어 카메라를 통하지 않아도 그 존재가 또렷하게 드러난다. 넓은 하늘 위에 길게 다리를 놓은 듯 펼쳐지다가, 양쪽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나간다. 초록빛 사이로 붉은 기운이 섞이며 칼날처럼 날카로운 인상을 준다. 12년 전, 그때 보았던 오로라와 닮아 있다.


어느새 북쪽, 서쪽, 남쪽 하늘로 제각기 갈라지며 퍼져나간다. 곧 칼날 같은 날카로움은 사라지고, 솜사탕처럼 몽글몽글한 형체로 부드럽게 번진다.

이번 오로라는 움직임이 크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밝아졌다가 스르르 사라지고, 다시 커졌다가 희미해지길 몇 차례 반복했다. 처음의 가벼운 춤사위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본 오로라 중 가장 정적인 모습이었다.


12년 전에는 한겨울의 아이슬란드에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오로라를 찾아다니느라 풍경을 즐길 겨를이 없었다. 겨울의 아이슬란드는 1번 국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도로가 통제되고, 가게도 드물어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초록이 남아 있는 가을의 아이슬란드는 기온, 복장, 편의성 어느 면에서도 겨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온통 눈 세상이던 그때와 달리, 부드러운 초록빛이 대지를 감싸는 풍경은 마치 전혀 다른 나라에 온 듯하다. 이제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아이슬란드를 한 바퀴 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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