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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추분의 오로라

아이슬란드의 오로라 (2)

by Bora

처음엔 오로라가 맞나 싶었다.

밤 8시가 넘은 시각, 아이슬란드 북쪽 외딴 마을의 게스트하우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막 들어가려는데, J가 외친다.

“오로라 좀 봐!”

하늘이 반원형으로 뿌옇게 덮여 있었다. 카메라로 찍어보니, 오로라였다.


그러나 “뿌연 오로라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보고 있는 동안, 점점 초록빛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온 하늘을 덮기 시작했다. 진하지는 않지만, 동쪽에서 북쪽 하늘까지 전체를 휘감아버리니 마치 수채물감으로 하늘 도화지를 칠한 듯했다. 별들은 총총 반짝이고, 마침내 군데군데 진초록 소용돌이와 연한 오로라 커튼이 나타났다.


오로라 지수가 낮아 기대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부드럽게 퍼지는 오로라라니. 미약하지만 밤하늘을 가득 덮으며 살짝살짝 포인트를 주는 그 모습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붉은빛도 살짝 섞여 있다. 이내 아주 연한 반원형 커튼으로 은은하게 남더니, 이번엔 횃불처럼 아래에서 위로 퍼져 올랐다.


지금 KP 지수는 1.67에 불과하지만, 아이슬란드 전역이 오로라 오벌 한가운데에 들어 있다.

한 시간 넘게 하늘에는 별과 함께 점묘화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느릿느릿, 하늘 곳곳에 연둣빛 물감을 뿌려놓은 듯했다.


그러나 이 풍경을 카메라에 온전히 담을 수는 없었다. 하늘에 너무 넓게 퍼져 있으니, 일부만 잘라 찍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눈에는 연둣빛 물감으로만 칠한 수채화 같은 풍경이, 카메라 렌즈를 통하면 상층에 붉은 기운을 머금은 진한 오로라로 변한다. 그림을 그릴 줄 안다면 꼭 물감으로 표현하고 싶은 풍경. 우리는 이 오로라에 젠틀 오로라라 이름 붙였다. 나에게 이번 젠틀 오로라는 수채화로 남을 것 같다.


이런 오로라도 나쁘지 않다.

보는 마음이 조급하지 않아 모든 것이 여유롭다. 오로라도 여유롭고, 내 마음도 여유롭다.

외진 곳에 자리한 이 숙소는 사방이 캄캄하다. 문만 열면 부드럽게 퍼지는 오로라가 펼쳐져 있다. 한참을 바라보다 추워지면 들어가 쉬고, 다시 나와 다른 녹색 그림을 바라보는 맛이라니.


별들이 반짝이는 아이슬란드의 밤하늘에서는 오로라 지수와 상관없이 오로라를 만날 수 있다.

다만 너무 약해서 맨눈으로 보기에는 뿌옇게만 보인다는 게 문제다. 그러나 미약한 오로라도 조금만 기다려주면, “나도 오로라야” 하고 존재감을 드러낼 때가 온다.


비록 내가 생각한 ‘진정한 오로라’는 아닐지라도, 강렬한 오로라가 오지 않은 날에도 별빛 반짝이는 밤하늘을 연초록빛으로 덮어주던 그 풍경은, 내 마음속 오로라 풍경 중 하나로 오래 남을 것 같다.




이번에 아이슬란드에 머무는 보름 동안 KP지수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나마 세 번 정도 지수가 4까지 오른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첫 번째 때는 만족스러운 오로라를 볼 수 있었다. 일기예보를 꼼꼼히 확인하며 날씨가 좋은 방향으로 동선을 잡은 덕분에, 지수가 약해도 은은하게 퍼지는 부드러운 오로라를 연일 만날 수 있었다. 포근하게 감싸주는 그 부드러운 오로라의 빛이 마음속에도 살포시 내려앉았다.


하지만, 제대로 ‘터지는’ 오로라도 한 번쯤은 봐야 하지 않을까. 두 번째로 KP지수가 4까지 오른다는 예보가 있던 날, 확실한 만남을 기대하며 아이슬란드에서 맑은 날 확률이 가장 높은 북쪽으로 향하기로 했다. 이틀 동안 날씨가 맑을 확률이 높다는 미바튼 호수(Mývatn)에서 멀지 않은 고다포스(Goðafoss) 주변의 호텔을 예약했다.


아이슬란드에 도착한 지 9일째 되는 날, 하루 종일 하늘이 맑았다. 너무 눈이 부셔 운전하기 힘들 정도였다. 위도가 높아질수록 태양이 낮게 움직여 햇살이 사선으로 깊게 들어오는데, 그 빛이 낯설면서도 강렬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오랜만의 맑은 날씨가 그저 반갑기만 하다.


일단 미바튼 호수 일대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역시 가을이 좋다. 12년 전 겨울에 왔을 때는 쓸쓸하고 인적조차 드물었는데, 이번엔 단풍이 곱게 물들고 관광객도 제법 보였다. 미바튼 지역에는 화산 분화구 트레킹, 지열 지대 트레일, 온천 체험 등 가보고 싶은 곳이 정말 많았다


지난번 오로라를 봤던 셀 호텔에도 들렀다.

우리는 미바튼 호수 대신 숙소 근처의 고다포스에서 오로라를 기다리기로 했다. 고다포스는 ‘신들의 폭포’라 불리는, 폭포의 나라 아이슬란드에서도 손꼽히는 명소다.


30미터에 달하는 너른 물줄기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장쾌하게 떨어진다. 하얗게 빛나는 폭포의 물이 한밤중에 얼마나 잘 표현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로라가 뜨는 방향과 일치하고 접근성도 좋아 보였다.


일찍 저녁을 먹고 고다포스로 향했다. 황혼빛이 잦아드는 8시를 넘기자 동쪽과 서쪽 하늘에서 오로라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폭포에 도착하자마자, 마침 그 위로 오로라가 솟아오른다. 살짝 붉은빛을 머금은 오로라가 너른 폭포 위로 퍼지며 빛나는 모습이,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그날 밤늦게까지 폭포와 오로라, 그리고 밤하늘 가득 퍼진 초록빛 향연을 마음껏 즐겼다.


고다포스 위로 펼쳐진 아름다운 오로라를 보고 나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아이슬란드에 온 지 10일째 되는 다음날이, 이번 여행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이후에는 비 예보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렸지만, 예보에 따르면 저녁 이후에는 맑아지고 KP지수도 괜찮을 전망이다. 비를 맞으며 고다포스 상류에 있는 알데이야르포스(Aldeyjarfoss)를 향해 사륜구동차로만 갈 수 있는 험한 산길, F도로를 달렸다. 찾기 어려운 하이랜드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 폭포는 아무나 올 수 없는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폭포의 모양도 독특했다. 세게 틀어놓은 수도꼭지 아래 세면대에 물이 모이는 듯한 형상에, 폭포 양옆의 절벽에는 주상절리가 촘촘히 이어져 있었다.


오후가 되자 KP지수가 5까지 올랐다. 그러나 밝을 때의 지수는 아무 소용이 없다. 낮에는 오로라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해 질 무렵 J는 고다포스 옆의 작은 폭포 쪽으로, 나는 폭포 위의 나무다리로 향했다. 아직 황혼빛이 남아 있는 하늘에서 오로라가 피어올랐다. 이렇게 밝은 시간에 오로라를 본 것은 처음이다.


황혼빛 속의 오로라는 캄캄한 밤에 보는 것과 달라 낯설지만 신비롭다. 새로운 오로라가 밤하늘을 덮으며 온 세상이 초록빛으로 변한다. 진하지는 않아도 넓게 퍼져 하늘 가득 펼쳐진 오로라의 세계였다. 동쪽, 서쪽, 그리고 머리 위에서 오로라가 차례로 나타나고, 나는 고개를 돌려가며 그 장면을 눈에 담았다. 화려한 춤은 없어도, 오로라는 세졌다가 약해졌다를 반복하며 별빛과 함께 피어올랐다가 점점 짙어지는 구름 속에 연한 빛만 남겼다.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가는 길, 도착하기 직전 다시 오로라가 솟아올랐다. 횃불처럼, 구름다리처럼 존재를 빛내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가장 강한 오로라였다. 춤을 추거나 커튼처럼 짙게 드리우는 장관은 아니었지만, 연하게 퍼지다 갑자기 진하게 모여 타오르는 모습이 불꽃처럼 생생했다.


오로라 앱의 구름 지도를 보니, 아이슬란드 전역 중 오직 우리가 있는 동북부 지역만 하늘이 열려 있었다. 예보를 보고 미리 이쪽으로 이동한 건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결국 쉬지도 못한 채 한밤중까지 찬바람 속에서 오로라를 원 없이 바라보았다. 춥기는 했지만, 한겨울 추위에 비하면 견딜 만했다.


그날 밤, 스페이스웨더닷컴에서는 이날의 오로라를 ‘러셀-맥페런 효과(Russell–McPherron Effect)’로 분석했다. 학자 러셀과 맥페런이 주장한 이 현상은, 춘분과 추분 무렵에 태양 흑점의 활동과 관계없이 오로라가 강하게 발생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태양의 자기장이 지구의 자기장과 특별히 잘 연결되어, 태양풍이 그대로 지구 자기권 안으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분에 맞춰 오로라 여행을 계획한 것이 주효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바로 그날, 우리의 바람에 응답하듯 하늘이 오로라로 화답해 주었다. 고마운 오로라, 그리고 이 모든 순간을 허락해 준 하늘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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