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의 오로라 (3)
추분 효과의 영향으로 지자기 폭풍이 터졌다.
아이슬란드에 도착한 지 아홉째 되는 날이었다. 하루로 끝날 줄 알았던 지자기 폭풍은 좀처럼 힘을 잃지 않고, 연일 KP지수를 5에서 최대 7까지 끌어올리며 우리가 떠나는 날까지 꼬박 엿새 동안 오로라 스톰을 일으켰다. 전 세계 곳곳에서 환상적인 오로라 사진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떻게 우리가 머무는 동안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하늘에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할 일이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처음 이틀은 다행히 북쪽의 고다포스(Goðafoss)에서 무사히 오로라를 만났지만, 생각보다 강렬하지 않았다. 하늘 가득 초록빛 오로라가 펼쳐지긴 했으나, 잠깐씩 연기처럼, 횃불처럼, 혹은 머리띠처럼 모였다가 힘을 잃고 흩어지곤 했다.
게다가 지자기 폭풍의 수치는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우리는 오로라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게 생겼다.
여행 중반에 날씨 예보와 동선을 감안해 마지막 나흘은 서부 지역인 스네펠스네스 반도와 레이캬비크 북쪽에 숙소를 잡았는데, 이 지역은 내내 비와 구름 예보 뿐이었다.
오로라 앱 지도에서는 강도에 따라 색으로 구분해 보여준다. 지수 2는 초록, 5 이상은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한눈에 알아보기 쉽다. 내가 있는 지역이 빨간색 안에 들어가면, 거의 틀림없이 오로라를 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변수는 바로 구름의 양이다. 하늘이 구름으로 완전히 덮여 있다면, 아무리 강력한 지자기 폭풍이라도 소용이 없다.
아이슬란드에서도 레이캬비크를 포함한 남부와 서부 지역은 북대서양 해류의 영향으로 본래 비구름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KP지수 예보를 참고해, 날씨가 비교적 좋은 동부와 북부 지역을 먼저 돌았다. 덕분에 KP지수가 약한 날에도 거의 매일 오로라를 볼 수 있었다. 지자기 폭풍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북부에 머물며 원하는 장면을 무사히 만날 수 있었다. 마지막 일정은 오로라 지수도 낮고, 날씨도 흐릴 예정이라 서부에서 여유롭게 마무리하려 했는데, 뜻밖에도 지자기 폭풍이 몰아쳤다.
아이슬란드 기상청의 일기 예보는 시간대별·지역별로 꽤 정확하다. 마지막 나흘 동안 서부와 레이캬비크 주변 예보는 ‘비와 흐림’뿐이었다. 그래도 구름 지도에는 간헐적으로 하늘이 열리는 시간대가 보여,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다.
스네펠스네스 반도는 ‘아이슬란드 자연의 축소판’이라 불린다. J는 이곳에서, 아이슬란드 특유의 풍경을 배경으로 오로라와 함께 사진을 찍을 꿈에 부풀어 있었다. 게다가 이번엔 지자기 폭풍이라니! KP지수는 5에서 순간적으로 7까지 치솟고, 오로라 지도는 이 지역을 붉게 뒤덮었다.
그러나 서부에 도착한 첫날부터 비와 바람, 짙은 구름 속에서 새벽 4시까지 기다리다 결국 실패. 둘째 날도 날씨는 나아지지 않았다. 두꺼운 구름 사이로 간신히 열린 하늘 틈에는 초록빛이 가득했다. 구름 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오로라가 얼마나 강한지, 때때로 구름을 뚫고 초록빛 섬광이 피어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비는 수시로 쏟아졌고, 어둠 속을 헤매다 우비와 우산도 하나씩 잃었다. 나는 새벽 1시까지, J는 4시까지 하늘을 바라보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셋째 날은 레이캬비크 근처 숙소에 예약이 되어 있었다. 예보에는 KP지수 5, 동부와 북부는 맑음이지만 우리가 있는 서부는 여전히 흐림이다. J는 하루 종일 KP지수와 날씨 앱, 남들이 올린 오로라 사진을 보며 한숨만 쉬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지자기 폭풍 소식을 들으며 ‘저기선 지금 오로라가 쏟아지겠구나’ 하고 부러워한 적이 몇 번이던가. 그런데 정작 오로라 오벌 안에 들어와서 이런 상황이라니. 나도 오로라 스톰이 어떤지 직접 보고 싶었다.
취소 불가 숙소로 향하며 시간을 계산해 봤다. 북부 미바튼(Mývatn) 지역까지 약 5시간, 동부 끝까지는 8시간 거리다.
“오늘 밤 북쪽으로 가서 오로라 보고, 그냥 도미토리룸 하나 잡아 자고 올까? 숙박비야 이중으로 쓰는 셈 치고.”
그 말을 하자마자, 내가 반대할 게 뻔해 말을 못 꺼내던 J가 반색을 했다.
“좋지! 그런데 굳이 숙소는 잡지 말자. 밤새 오로라 찾아다니다가 새벽에 돌아오자.”
이틀째 한두 시간밖에 못 자고 허탕만 친 J는, 오로라만 볼 수 있다면 장시간 운전쯤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우린 오로라 체이서잖아.”
그리하여 오후 3시, 숙소에 가방만 내려두고 북동쪽으로 차를 몰았다. 결국 밤을 새우며 17시간 동안 운전하고 오로라를 찾아다닌 끝에, 다음 날 아침 8시에 숙소로 돌아왔다.
결과는?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밤 8시가 넘어 도착한 북쪽 마을에서, 우리는 춤추는 오로라와 오랜만에 올라온 반달을 함께 보았다. 오로라는 새벽녘까지 온 하늘을 초록빛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나는 오로라 스톰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북유럽, 알래스카, 캐나다의 오로라처럼 몇십 분에서 한 시간씩 이어지는 장관이 아니라, 이곳의 오로라는 몇십 초를 넘기지 못했다. 하늘을 가득 채웠다가 스르르 사라지고, 동서로 아치를 그리다가 금세 흔적을 감춘다. 카메라에는 온 하늘이 초록빛으로 덮여 나오지만, 지속성이나 강렬함이 부족했다. 내가 기대하던 ‘오로라 스톰’은 없었다.
지쳐 있던 나는 자정이 넘자 차 안에서 졸며 J를 기다렸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던 그는, 노랑·빨강·주황·초록이 뒤섞인 스톰을 봤다고 했다. 초록빛 하늘이 번쩍이며 마치 번개가 치듯 오로라가 터지는 것도. 너무 순간적이라 카메라에 담지도 못하고, 나도 부르지 못했다 했다.
그 장면을 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나는 끝없이 하늘을 올려다볼 체력과 끈기까지는 없다.
“오로라는 부지런해야 보는 거야.”
함께 보지 못한 걸 J는 아쉬워했지만 혼자라도 봤으니 다행이다.
나는 노르웨이에서 순식간에 다가와 나를 결박하던 오로라 폭풍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마 그때도 그 순간, 그 방향을 보고 있지 않았다면 놓쳤을지도 모른다.
찰나의 순간.
놓치면 그것으로 끝.
오로라가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가 아마 그런 것 아닐까.
밤을 꼴딱 새운 J를 옆에 재우고, 나는 새벽의 링로드를 달렸다.
사방이 어슴푸레해져 분간이 어려운 '개와 늑대의 시간'. 오로지 나만 깨어 아무도 없는 1번 국도를 달렸다.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을 맞으며, ‘우리의 오로라 여행이 이렇게 클라이맥스를 맺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 동안 들르지 못한 곳마다 구글맵에 ‘2036 오로라’라는 메모를 남겼다. 다시 올 날이 있을지 모르지만, 웃으며 기록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 날 밤, 우리의 숙소 근처에서도 오로라 스톰이 찾아왔다. 짧지만 하늘을 가득 덮은 초록의 향연.
우리의 화양연화, 오로라 체이싱의 대미를 이렇게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