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오로라 (1)
로마와 암스테르담, 오슬로를 거쳐 도착한 노르웨이 북부 트롬소 공항.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에 떠 있는 오로라 사진을 보며 ‘유럽 오로라의 수도’라는 이름이 과장이 아님을 실감한다. 하지만 바깥에는 지금 세찬 비가 내리고 있다. 트롬소의 기상은 일주일 내내 눈, 비 예보, 강수확률은 100%! 설상가상으로 눈사태, 산사태 주의보까지 내려 있다. 게다가 Kp지수는 최저치인 1. ’매우 조용함‘을 가리키고 있다. 상황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오로라만을 위해 여행한다면 확률이 높은 캐나다 옐로나이프를 택했겠지만, 우리는 북유럽 풍경과 어우러진 오로라를 보고 싶다. 설산과 피오르도, 눈 덮인 핀란드의 숲길도 아름답겠지? 앞으로 3주나 있을 예정인데 설마 몇 번은 오로라를 조우하게 되지 않을까?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며 그저 여행을 즐기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하룻밤만 트롬소에서 묵고, 멀리 떨어진 로포텐 제도로 향하기로 했다. 수많은 피오르와 뾰족한 바위산이 해안선을 따라 어우러지는 로포텐은 스칸디나비아에 찍어둔 수많은 오로라 포인트 중 J가 최우선으로 꼽은 장소다. 쏟아지는 비바람을 맞으며 진창과 얼음이 뒤섞인 도로를 달려 트롬소 교외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공용 욕실과 작은 방만 있는 객실은 따뜻했지만 창밖 풍경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곧이어 벨기에에서 온 로잘린이 도착했다.
“지난 9월 여기서 첫 오로라를 봤어. 이번에는 3주간 머물며 제대로 오로라를 만나보려고 해.” 주변에 가로등 하나 없는 이 숙소는 오로라를 보기 좋은 곳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커플도 밤새 오로라를 기다리겠다며 밖으로 나섰지만, 세찬 비바람만 몰아칠 뿐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몇 밤이나 맑은 날을 볼 수 있을까.
희망적인 소식도 있다. 한 달간 잠잠하던 태양 흑점이 왕성하게 활동하며 X등급에 근접한 태양 플레어를 방출했고, 이틀 후에는 지구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로포텐에서 오로라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아침에 렌터카를 몰고 트롬소에서 남서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로포텐 제도로 향했다. 트롬소에서 로포텐 제도 끝까지 한 번에 가기는 힘들어, 초입에 있는 소트란드 섬의 호텔에서 이틀을 자고 들어가기로 했다. 스파이크가 박힌 타이어 덕분에 운전은 할 만하지만 얼음과 눈, 진창이 뒤섞여 있는 도로에서 시간은 계속 늘어난다.
전날 렌터카 데스크에서 안내 문구를 보며 웃었었다.
“북극의 겨울 운전에 익숙하십니까? 사진을 찍기 위해 도로 한가운데 멈추지 마세요. 지도 앱만 의존하지 마세요. 길을 잃거나 깊은 눈 속에 갇힐 수 있습니다.... 겨울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글맵만 믿다가 된통 발목을 잡혔다. 트롬소에서 소트란드로 가는 길로 선택한 최단 경로에 페리 항로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5시쯤 ’이제 한 시간이면 호텔에 도착할 수 있겠다‘ 생각하며 렙스네스 마을을 지났는데, 갑자기 도로가 뚝 끊어지면서 눈앞에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가 나타났다. "헉, 이게 뭐야!" 자칫하다가는 어두운 밤에 차를 몰고 북극해로 들어갈 뻔했다.
파도가 철썩이는 바닷가에 차를 세웠다.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적막강산에 페리 표지판만 외로이 서 있다. 문제는 렙스네스 페리 나루터에는 불빛도, 인기척도 전혀 없다는 것. 표지판에 적혀있는 페리 운영사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오늘은 회사 사정으로 결항'이란다. 먼 길을 다시 돌아나가 소트란드까지 가려면 앞으로 3시간이 더 걸린다. 아침 10시에 출발하여 점심은 차에서 샌드위치로 때우며 달린 결과가 밤 8시에나 간신히 도착이라니.
한숨을 쉬며 차를 돌리려는데 J가 말한다.
"여기 완전 깜깜 세상인데 돌아가는 길에 해안도로에서 오로라를 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녁도 길에서 대충 먹고 오로라를 제대로 찾아보자.
오후까지만 해도 낮았던 Kp지수가 4.0 이상으로 올라가고 구름도 점차 걷히며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찬스도 44%까지 상승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다시 돌아 로포텐 제도로 연결되는 소르홀멘 다리(Sørholmen Bridge) 입구까지 한 시간을 달렸다. 다시 반대쪽 길로 두 시간을 더 달려야 소트란드에 도착한다.
소르홀멘 다리 옆을 지날 무렵 오로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둘러 도로 옆 바닷가 공터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머리 위 하늘에 오로라가 떠오른다. 처음에는 희뿌연 색으로 흐리게 보였지만 녹색으로 바뀌면서 제법 넓게 퍼진다.
급하게 차를 세운 곳은 파노라마 뷰포인트, 바로 앞에 바다가 있고 뒤쪽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어 사방이 열려있는 곳이다.
보통 오로라는 북쪽 하늘에 나타난다. 하지만 여기처럼 위도가 높은 고위도 북극권에서는 방향을 가리지 않는 것 같다.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이어지다 북쪽 하늘 높이 솟아 나오기도 하니 어느 방향에서 나올지 짐작할 수가 없다. 이번에는 소르홀멘 다리 바로 위로 멋진 오로라가 나타났다.
바다에서 V자 모양으로 양갈래로 뻗으면서 제대로 초록빛을 보여주는 오로라는 뒷산까지 이어지며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한다.
별들은 어찌나 총총한지 마치 쏟아질 듯하다. 점점 굵게 퍼지다 붉은빛도 살짝 나타난다. 바다 위 넓게 퍼진 구름과 그 위의 별, 그리고 오로라가 온 하늘로 아스라이 넓게 퍼져 간다.
마지막으로 내가 사랑하는 오로라 커튼이 드리워지더니 내 머리 위에 거대한 띠를 두르듯 바다에서 산 위까지 이어진다. 그 띠가 머리 위에서 더욱 넓게 퍼지며 그 속에 별들이 반짝이니, 내가 오로라 머리띠를 두른 천상의 존재가 돼 버렸다.
넓고 짙게 퍼지며 춤을 추기 시작하더니 이내 둥근 모양을 만든다. 너무 넓어 카메라로는 다 찍을 수가 없다. 고개를 한껏 들어 눈에, 가슴에 가득 담을 수밖에.
어느 순간 다리 위로 두꺼운 초록빛 오로라 커튼이 생겼다. 겹겹이 쳐진 커튼이 거대하게 늘어나다가 온 하늘에 퍼지면서 내게로 다가온다. 나를 둘러싼 온 세상을 오로라가 감싸안듯 순식간에 다가오면서, 나는 오로라에 갇혀 버렸다. 오로라의 위엄에 압도된 나는 그저 '와아아' 소리만 지르며 온몸이 굳어버렸다.
내 뒤에서 그 광경을 보던 J는 장엄한 오로라를 동영상에 담아보려고 나에게 카메라 세팅을 도와달라며 몇 번이나 소리쳤다지만, 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불과 몇십 초, '찰나'의 순간 나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이 멋진 오로라는 바로 이날 지구에 도달하여 자기 폭풍을 촉발한 태양풍의 결과였다. 비록 지구를 비껴갔다지만 우리가 가는 길에 이런 압도적인 정경을 선사한 것이다.
거의 한 시간 넘게 우주의 황홀한 춤사위를 보고 나니 이게 꿈인 듯싶다. 그러나 거대한 오로라 커튼이 출렁이며 내게 다가오던 그 순간만은 온몸에 각인되어 잊히지 않는다. J도 나도 감동으로 하늘을 보느라 클라이맥스의 그 순간은 기록하지 못했다. 다만 파르르 떨며 물러나는 마지막 장면만을 나의 흔들리는 휴대폰 카메라로 살짝 찍었을 뿐.
오로라 체이서로서 최고의 순간을 한껏 맞은 나와 달리 J는 감동과 함께 못내 아쉬워했다.
"동영상 욕심을 내지 말고 사진을 찍었어야 했어. “
그는 오로라가 갑자기 몇 배나 밝아지면서 정신없이 춤을 추기 시작한 순간 그 정도 밝기라면 동영상도 문제없이 찍힐 거라 생각하여 카메라 모드를 사진에서 동영상으로 바꿨으나 세팅에 정신이 팔려 클라이맥스를 그냥 날려버린 것이다.
천상의 오로라를 만난 급박한 순간, 판단 착오로 제대로 카메라에 담지 못했으니 더욱 안타까웠겠지.
만약 이날 예정대로 6시에 호텔에 도착했다면 아마 저녁을 먹은 다음에 오로라를 찾으러 갈 생각으로 시간을 다 흘려보내고 말았을 것이다. 오히려 길을 잘못 들어 이런 최고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으니, 이 모든 행운이 우연일지 필연일지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멀리 돌아가는 길 고생한다고 분에 넘치는 위로의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다. 온몸에 차오르는 충만함 속에 호텔에 도착한 시각은 밤 11시. 트롬소를 출발한 지 무려 13시간 만에 도착하여 몸은 파김치가 되었지만, 마음만은 그저 행복과 감사로 가득한 최고의 하루였다.
내 오로라 여행의 정점으로 기록될 순간이었다. 내 인생의 오로라를 만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