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의 오로라 (2)
우리는 페어뱅크스에서 숙소를 두 군데 잡았다. 처음 묵은 곳은 공항 인근의 호텔이었다. 오로라가 뜨면 알림 서비스를 해주는 곳으로, 묵었던 방 이름도 '오로라 뷰 룸'이다.
그러나 이 호텔 주변은 오로라를 보기에는 너무 밝다. 호텔 조명에다 시내와 멀지 않아 도시의 빛 공해가 있으므로 강렬한 오로라가 아니고서는 제대로 보기 힘든 곳이다. 호텔에서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오로라 뷰 룸‘이라는 이름 밑에 '행운이 있다면'이라는 문구를 조그맣게 덧붙이는 걸로 한 가닥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놨다.
페어뱅크스는 오로라 관측 포인트 안내가 잘 돼 있어 차를 몰고 오로라 관찰에 좋은 장소를 찾아가면 된다.
그러나 연일 눈길에서 운전을 하면서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게다가 오로라는 주로 자정 전후에 활발하니 너무 멀리 나가면 새벽에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고단하다.
둘째 날,
저녁을 먹은 후 낮에 답사했던, 체나 호수로 향했다. 사방이 시원하게 트여있어 오로라를 기다리기에 좋은 곳이다. 연일 잠이 모자란 나는 차에서 깊은 잠이 들어버렸다. 11시에 오로라가 나타났다며 J가 나를 깨웠다. 하늘에 초록빛이 희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직 약하잖아." 핑계를 대며 졸다 깨다 30분은 지났나 싶은데 오로라가 점점 세지기 시작한다.
그동안 본 적 없는 아치 모양의 오로라가 하늘을 이어주고 잠시 쉬는가 했더니 북동쪽 지평선에서 북서쪽 지평선까지 완벽하게 다리를 만든다. 별들은 점점 늘어나 밤하늘에 가득하고 반달도 은은한 빛을 발한다.
내가 사랑하는 오로라 너울도 나타나고 꿈결 같이 사랑스럽게, 붉은빛까지 보이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알래스카에 온 지 이틀 만에 이렇게 힘차게 춤을 추는 오로라를 만나다니 가슴 벅차게 고마울 뿐이다.
새로 더해진 기쁜 소식.
스페이스웨더닷컴에서 태양 흑점이 폭발하여 지구를 향해 태양풍이 날아오고 있다는 알림 메일이 왔다. 흑점 폭발로 인한 태양풍은 이틀 만에 지구에 도착한다. 수치가 아주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날씨만 받쳐준다면 멋진 오로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두 번째 숙소는 마당에서 오로라를 바로 볼 수 있는 단독주택으로 잡았다. 노던 스카이 로지는 북쪽 하늘이 열려있고 주위가 침엽수림으로 둘러싸여 있어 오로라를 관찰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숙소에 미리 전화를 걸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방향의 방으로 예약해 뒀다. 방에 들어서보니 북쪽으로 창이 나서 만약 오로라가 뜬다면 방 안에서도 편안하게 볼 수 있겠다.
자다가 문득 눈을 떴을 때 창문 가득 오로라 커튼이 드리워져있다면 어떨까,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 마당에 서서 눈 쌓인 침엽수 사이로 솟아오르는 오로라를 볼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며칠 만에 밤에 어두운 곳을 찾아 멀리 나갈 일 없이 집에서 저녁도 해 먹고 여유 있게 오로라를 기다렸다. 달빛도 환하고 별도 총총하니 이제 오로라만 뜨면 되는데 12시가 되어도 기척이 없다. 그날 밤 결국 오로라는 보지 못했다. 나는 한 시경 일단 침대에 누워 소식을 기다리기로 했고 새벽 세 시까지 버티던 J도 결국은 포기했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알래스카 페어뱅크스 대학의 오로라 실시간 관측 영상을 다시 돌려보니 새벽 5시경에 중간 급의 오로라가 한 차례 왔었다.
셋째 날은 비록 공쳤지만 페어뱅크스에서의 오로라 관찰은 첫날의 작은 만남과 둘째 날의 넉넉한 만남으로 소기의 성과는 거둔 셈이다.
작년 이맘때 페어뱅크스를 9일간 방문했던 사람이 닷새는 눈을 만나고 간신히 이틀만 보았다는 내용을 찾아보며 어제 못 만난 아쉬움을 위로해 본다. 재수 없으면 도착해서 닷새 내내 눈만 보다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긴, 어떻게 매일 오로라를 만나기를 바라겠는가. 천체 현상이 인간의 예상대로 돼 줄 거라는 생각 자체가 교만 아닐까.
한밤중에 오로라를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니 수면 부족과 컨디션 조절도 관건이다. 늦잠을 잔다 해도 한계가 있어 낮에는 알래스카의 겨울 풍경을 즐겼다. 눈옷을 입은 침엽수림 사이로 달리다 보면 온통 새하얀 눈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페어뱅크스 근처를 통과하는 알래스카 파이프라인도 흥미로웠다. 1958년 알래스카 최북단 프루도 만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미국은 원유를 운송하는 파이프라인을 계획한다.
1977년 착공하여 1979년 완공된 800마일, 1280km 길이의 알래스카 종단 파이프라인은 프루도 만(Prudhoe Bay)에서 툰드라 지대를 지나고 험준한 산과 강을 통과하여 얼음이 없는 항구인 앵커리지 옆 발데즈(Valdez)까지 뻗어 있다.
페어뱅크스 옆에는 북극 마을이 있다. 지구상 유일하게 북극(Noth Pole)이란 이름을 가진 마을이다. 북극 마을에는 산타클로스 집도 있다. 기념품점이지만 산타 할아버지도 근사하고 집도 예쁘게 지어서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한 번씩 들르는 명소다.
한가한 낮에는 숙소에서 ’북극 놀이‘를 했다. 외부 기온은 영하 41도. 먹던 컵라면을 들고 바깥에 나가 젓가락으로 라면 국수를 들어 올리면 바로 얼어버리기 때문에 불과 몇 초 만에 젓가락을 허공에 떠있게 하는 신공을 벌일 수 있다.
오로라는 맑은 날씨에만 볼 수 있다. 그 말은 오로라가 뜰 때는 기온이 더욱 쨍하게 낮아진다는 뜻이다.
옷과 방한 장비를 탄탄히 갖추면 어느 정도까지는 버틸 수 있지만 조금만 허술하게 입은 채로 나간다면 그대로 북극 바람이 온몸에 스며든다.
영하 40도 이하에서 조금 방심하여 덜 갖춘 복장으로 문밖에 나설 경우 견딜 수 있는 한계는 불과 1~2분 정도였다. 바깥에 나설 때마다 들이쉬는 매서운 북극의 공기가 폐로 들어갈 때의 이상한 느낌은 이곳에 머무는 내내 새삼스러웠다.
넷째 날은 페어뱅크스 오로라 센터의 예보가 엑설런트, 스페이스웨더닷컴 예보로는 태양풍이 지구에 도착한다는 날이다. 이 날의 최저 기온은 영하 40도, 기대되는 밤이다. 마지막 날은 비행기 시간 때문에 늦게까지 기다리지 못하니 넷째 날을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오로라와의 만남에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밤 11시까지 기다리다 J가 먼저 자고 내가 잠이 오면 교대하기로 했다. 밤하늘을 내다보다 집안에 들어와 페어뱅크스 대학의 실시간 오로라 영상을 수시로 새로고침해가면서 확인해 보기를 반복했다.
11시 40분이 넘어 실시간 오로라 영상에서 화면 아래쪽이 초록으로 물들기 시작하면서 곧이어 오로라가 사르르 올라왔다.
얼른 문을 열고 밖에 나가봤다. 북동쪽 하늘에 초록빛 오로라가 나타나면서 길게 북서쪽까지 퍼져나간다. 서둘러 잠자는 J를 깨우고 준비하고 - 모자, 장갑 끼고 코트 입고, 부츠 신고 나가서 눈으로 보며 사진도 찍어본다.
침엽수림 사이로 초록빛 오로라가 옅게 퍼지면서 오히려 분위기는 더 좋다. 그러나 J가 허둥지둥 차려입고 카메라를 세팅하는 사이 오로라는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시작부터 20분이나 지속됐으려나? 곧 돌아오겠지 하며 다시 기다림의 시작. 한 시간을 기다리다 일단 내가 좀 더 버티기로 하고 J는 다시 누웠다. 페어뱅크스 대학의 실시간 오로라 영상은 사람 애간장을 녹인다. 분명히 초록은 퍼져있고 북쪽으로 가늘게 초록선이 나오다 말다 하는데 제대로 진하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가끔씩 생기나 싶다가 사라지길 두 시간.
계속 창문에 코를 박고 바라보다가 3시가 되어 교대하자며 J를 깨워봤지만 이미 잠에 취한 그는 30분 알람만 해놓으라며 다시 쿨쿨 잠들어 버렸다. 이렇게 넷째 날도 아주 잠깐의 만남만 있었을 뿐 허무하게 끝났다.
아침에 일어나 다시 오로라 예보를 확인했다. 어제 도착한다던 강력한 태양풍은 약한 걸로 바뀌면서 새로운 강력한 태양풍이 일어나 내일 도착한단다. 태양에는 또 다른 흑점 두 개가 생성되고 있다고 한다.
이상하리만큼 잠잠했던 기간이 지나고 진짜 태양풍이 터지는 날 돌아가야 하다니. 그나마 둘째 날 만났던 오로라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집에서 편하게 오로라를 맞으려던 우리가 게을렀던 건 아닐까? 바깥에 나가 모든 채비를 갖추고 기다렸다면 짧은 만남도 좀 더 알차게 맞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마지막 날 비행기는 새벽 1시 반 출발. 일부러 비행기에서 오로라를 보려고 밤 비행기를 잡았다. 그전까지 마지막 시도를 해보려고 공항에 가기 전 페어뱅크스 시내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장소로 소개된 크리머스 필드로 갔다. 약간의 불빛은 있지만 넓은 들판이라 어디에서 뜨든 보기는 괜찮을 듯했다. 저녁을 먹고 차에서 기다리다 나는 잠이 들었다. 9시경 낮게 살짝 오로라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사라져 버렸다. 이제 미련을 접을 시간. 돌아가는 비행기에서도 창에 비껴있는 오로라가 살짝 보였지만 그 정도는 본 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미국에서 오로라를 보기 가장 좋은 곳, 페어뱅크스에 와서 오로라를 보기로 한 건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비교적 큰 도시에 기반 시설도 잘 되어 있고 접근도 쉬워 오로라를 찾아다니기가 편리했다.
2024년 가을부터 2025년 봄까지가 이번 극대기에서 오로라가 가장 왕성할 시기이고, 2026년까지는 활동이 활발할 것이라고 하니 다음번엔 어디로 갈 것인가 의논해 본다. 문제는 오로라를 보러 갈 지역 모두 물가가 천정부지로 비싼 나라들이라는 것.
11년의 기다림 끝에 새로운 극대기가 찾아온 후 시도한 첫 오로라 여행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 또한 건방 떨지 말라는 하늘의 속삭임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