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의 오로라 (1)
나는 오로라의 신비스러운 광경에 빠져버렸으나 단지 오로라 그 자체만 보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세상에서 새로운 오로라를 보고 싶다. 11년 전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캐나다 옐로나이프에서 오로라를 보았으니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알래스카. 광활한 알래스카 어디에서 오로라를 관찰하는 것이 좋을지 검색해 본 결과 오로라 오벌 바로 아래 위치한 페어뱅크스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페어뱅크스는 20여 년 전 여름에 알래스카 여행을 왔다가 한번 지났던 곳이다. 이 도시의 위도는 옐로나이프보다 좀 더 북극에 가깝다. 내륙에 자리해 있어 날씨도 맑은 날이 많을 것 같았다.
평생 모은 마일리지로 우리는 두 차례의 세계일주를 했다. 두 번째 세계일주에 당연히 오로라를 향한 루트를 넣었다. 2024년 1월에 우리는 시애틀을 거쳐 마지막 목적지 알래스카 페어뱅크스로 떠났다.
이제 오로라 보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며 인터넷에서 오로라 관측에 관해 가장 권위가 있는 스페이스웨더닷컴 (www.spaceweather.com)에 꾸준히 들어가 봤다. 그 사이트에서는 그날의 Kp 지수와 태양 흑점 활동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Kp 지수란 미국해양대기청(NOAA) 우주환경센터에서 태양 흑점과 관련된 지구 고위도 자기장의 강도를 측정하여 0부터 9까지 등급화시킨 것을 말한다.
그런데 알래스카 방문을 앞두고 일주일째 오로라 Kp 지수가 2로 조용함(quiet)을 유지하고 있다. 즉, 오로라를 볼 확률이 매우 낮다는 뜻. Kp지수 2에서는 설령 오로라가 뜬다고 해도 희미한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페어뱅크스에 머무는 날짜는 고작 닷새, 태양 흑점이 폭발하고 나서 지구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이틀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흘 사이에 자기 폭풍이 터지지 않는 한 알래스카에서 장대한 오로라를 보겠다는 마음은 비워야 한다.
한겨울 페어뱅크스의 추위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기온이 괜찮을 때가 영하 25도, 조금 추워졌다 싶으면 영하 40도를 훌쩍 넘는다. 영하 15도만 찍어도 한파 경보가 발령되고 북극 한파가 온다며 호들갑을 떠는 나라에서 살다가 평생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추위에 대비하느라 짐이 많아졌다.
극지용 우모복, 방한 부츠의 부피와 무게가 만만치 않아 세계 일주 동안 그걸 모두 끌고 다닐 수는 없었다. 다행히 경유지인 시애틀에 조카가 살고 있어 지난봄에 동계 장비를 트렁크 하나에 채워 미리 보내둘 수 있었다.
렌터카도 걱정이었다. 미국 본토에서 최고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허츠도 알래스카에선 가격 메리트가 거의 없었다. 그래도 1년 전에 예약해 뒀다가 수시로 가격 비교를 해보며 계약을 갱신한 끝에 최종적으로는 미국의 일반 도시들과 큰 차이 없는 가격에 예약을 마쳤다. 이번 여행에 많이 이용한 엔터프라이즈 렌터카, 마음에 든다.
상상할 수 없는 추위 속에 차는 괜찮을까 걱정했지만 알래스카의 차들은 영하 40도를 넘는 한파에 대비해 잘 준비되어 있었다. 사륜구동차에 접지면의 트레드 깊이가 넉넉하고 스파이크가 박힌 동계용 타이어는 눈 덮인 길에서도 미끄러짐 없이 잘만 달렸다.
인상 깊은 건 북극 추위에 대비한 시동 보조 시스템이었다. 도착한 호텔에서 주차를 하고 내리려는데 모든 차의 라디에이터 그릴에서 나온 전기코드가 주차장 콘센트에 꽂혀 있다.
렌터카 직원이 영하 20도 아래, 특히 영하 40도가 되면 반드시 꽂아야 한다던 전기 코드는 자동차 후드 내부의 히터에 연결되어 극한의 온도에서도 시동이 걸리도록 도와주는 장치였다. 페어뱅크스 대부분의 주차장에는 이를 위한 전기 콘센트가 설치돼 있었다.
첫날 낮에는 차를 빌리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영하 30도 정도까지는 든든하게 차려입으면 버스를 갈아타며 시내를 다닐 만했다. 페어뱅크스 시내의 모리스 톰슨 센터 (Morris Thompson Cultural & Visitors Center)는 호텔 앞에서 대중교통으로 방문할 수 있는 곳이다. 옐로 라인 버스를 타고 레드 라인 버스로 한 번 갈아타면 된다. 11시쯤 출발하려고 구글맵을 여니 2시 넘어야 버스가 온다고 나온다. '원래 1시간 배차로 알았는데 뭐지?' 했더니 점심시간 동안은 운행을 하지 않는단다.
페어뱅크스 옐로 라인 버스기사는 단 한 사람. 평일 11시부터 6시까지만 근무하고 주말에는 쉰다. 참 정겨운 시스템이다.
버스에 올라 1일권 패스 2장을 사려고 6달러를 내니 시니어는 무료라면서 그냥 타라고 한다. J가 '내가 시니어로 보이냐?'라고 분개한 듯 말하니 "기사 생활 수십 년이야. 딱 보면 알지" 하며 웃는다. 자기랑 나이가 비슷해 보인다나? 몇 년생이냐고 물으니 알려주는데 J보다 한 살 많다. 그저께도 자기 집에서 오로라를 보았다며 내일과 모레 오로라가 좋을 거란다.
기사는 운전을 하면서 우리에게 '아침에 지진 났던 거 알아?'라고 묻는다. 그날 아침 우리는 호텔방에서 약한 진동을 느꼈었다. '엥, 그게 지진이었어?' 그 지진의 진도는 5.3이었다며 그 정도면 보통이란다. 이 지역이 환태평양 화산대라는 걸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이다.
버스 승객은 많지 않지만 타는 사람마다 살갑게 아는 척하는 모습이 모두 이웃사촌 같다. 경제성의 논리로 인구가 적다고 버스 노선을 없애고 줄이는 건 지방 소멸을 가속화시키는 미련한 짓이다. 그럴수록 대중교통을 유지시켜야 현지 주민들이 남아있을 수 있는 것 아닐까.
버스가 페어뱅크스 시내를 한 바퀴 돌아서 간 덕분에 시내 구경을 잘했다. 20여 년 전 한여름에 들렀던 페어뱅크스 시내는 꽃이 만발하고 화사한 거리였는데 눈 덮인 빙판길 거리도 분위기는 그에 못지않다.
모리스 톰슨 센터는 기대 이상이었다. 알래스카의 자연사를 전시해 놓은 전시장도 수준급이었지만 제일 좋았던 건 오로라 예보. 들어서자마자 오로라 안내판이 서 있고 바로 옆에는 사흘간의 오로라 예보가 지도와 함께 나와 있다.
오늘 오로라는 평균 이상. 내일은 엑설런트! 모레도 평균 이상. 아, 이 정도면 희망이 생긴다. 오로라 지수가 낮아 세게 터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볼 수는 있다!
밤에 공항에 가서 렌터카를 빌려 미리 점찍어둔 클리어리 서밋 오로라 관측 지점(Clearly Summit Aurora Viewing Area)으로 갔다.
북쪽 하늘이 보이게 차를 세우고 오로라를 기다린다. 하늘에 구름은 있지만 그 사이로 드문드문 별이 보인다. 오로라는 별과 함께 오니 기다릴 만하다.
그리고 잠시 후 저 멀리 아주 작은 초록색이 보인다. 그동안 몇 차례 보아서 작아도 오로라인지 아닌지는 구별할 수 있다.
오로라가 확실한지 확인하는 방법, 사진을 찍어서 녹색이 비치면 오로라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잠시 후 점차 커지면서 북쪽 하늘 여기저기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비록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아련하고 부드럽게, 살포시 왔다가 사라지는 오로라. 가느다란 나무 사이로 춤추듯 오가는 그 빛은 희미하지만 존재감은 충분했다.
새벽 2시 넘어서까지 오로라를 보고 나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멀고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첫날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