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명차 극장
코로나19로 최근에는 해외 여행이 어려워졌지만, 팬데믹 이전에 한창 주가를 올리던 여행지가 있었으니 바로 몽골입니다. 몽골의 끝없이 펼쳐진 평야를 달리며 대자연을 만끽하고, 밤에는 쏟아질 것 같은 은하수를 볼 수 있는 감성 충만한 여행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다른 여행지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추억이 가득한 몽골 여행이지만, 특히나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매력 포인트가 바로 '푸르공(Пургон)'입니다. 러시아어로 '밴(van)'이라는 뜻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오늘의 주인공인 UAZ-452를 부르는 애칭입니다. 낡고 밋밋하게 생겼지만, 어떤 지형에서나 지치지 않고 달리며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하는 몽골 여행의 동반자입니다. 몽골에서 이 차를 타 보고 한국에 돌아와 올드카에 입문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인데요.
꼭 몽골이 아니더라도 UAZ-452 '부한카(Буханка)'는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과 중앙아시아, 인도 등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밴입니다. 1965년 출시돼 반세기 넘게 낙후된 지역의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생산 중인 승합차이기도 한데요. 이 귀엽게 생긴 밴의 저력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사랑받는 것일까요?
밴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제 4륜구동을 곁들인
냉전 시대, 소련과 서방 국가들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전쟁을 준비하며 군비를 확장 중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자동차는 군대에서도 인력과 물자를 보급하기 위한 핵심 운송 수단으로 자리잡았고, 소련은 전선과 격오지에도 보급을 추진할 수 있는 소형 수송 차량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소련은 서유럽에 비해 도시 간의 간격이 훨씬 멀었고, 도로망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지역도 많았기에 우수한 험지 주파 능력을 지닌 보급용 차량이 절실했습니다. 사막과 얼어붙은 동토, 진흙탕이 뒤섞인 소련의 영토 어디서나 무리 없이 달릴 수 있어야 했고, 한겨울에 -50℃까지 떨어지는 혹한 환경에서도 고장나지 않는, 그런 차량이 말이죠.
물론 소련에는 이미 4륜구동 파워트레인을 탑재한 소형 트럭도 있었지만, 차체가 커 험지에서 불리한 부분이 있었고, 개방형 적재함은 사람을 실어 나르기도 불편하고 물자가 손상되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행여라도 한겨울에 허허벌판에서 차가 멈춰서면 추위를 피할 수도 없었고요.
이에 소련 군부는 군용 차량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던 울리야놉스크 자동차 공장(Ульяновский Автомобильный Завод, 러시아어 이니셜을 따 'UAZ'라고 부릅니다)에 험지를 쉽게 주파할 수 있고, 신뢰성이 뛰어나며, 인원과 물자를 충분히 실을 수 있는 소형 밴의 개발을 지시합니다. 아, 물론 생산 단가는 가능한 저렴해야 했죠.
UAZ는 마침 과잉생산돼 남아돌던 전술 차량, GAZ-69의 프레임과 구동계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합니다. GAZ-69는 미군의 소규모 병력 및 물자 수송 용도로 만들어진, 그러니까 소련의 지프 같은 차였습니다. 단순한 구조에 신뢰성도 뛰어나 소련은 물론 동유럽 위성국가에도 대량 공여된 수작이었는데요.
프레임과 프론트 엔진-파트타임 4륜구동 설계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최대한 공간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운전석을 엔진 윗쪽에 배치하는 포워드 컨트롤(forward control, 캡-오버라고도 합니다) 구조를 소련 최초로 채택하고, 차체 뒷편은 오롯이 적재 공간으로 만듭니다.
이렇게 '뚝딱' 만들어낸 밴이 바로 UAZ-450이었습니다. 1958년 처음 공개된 UAZ-450은 기존 전술 차량의 설계를 그대로 가져다 캐빈만 바꿨으니 개발 및 생산 비용을 아낀 건 물론이거니와, 전장이 4.3m에 불과해 좁은 산길도 문제 없이 달릴 수 있었죠. 그럼에도 최대 9명의 사람을 태우거나 800kg에 달하는 화물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소련 당국은 UAZ-450의 성능에 매우 만족했고, 이후 1965년까지 5만 5,000대 이상의 UAZ-450이 생산됐고, 우수한 실용성과 기동성에 민간에서도 판매 요구가 빗발치며 UAZ 최초의 민수용 차량으로도 시판됩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도 윌리스 지프의 설계를 기반으로 한 소형 상용차, 지프 포워드 컨트롤이 출시됐는데요. 일각에서는 UAZ-450이 이 차를 카피해 만든 차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현재로선 실제로 UAZ의 엔지니어들이 지프를 카피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비슷한 요구에 의해 우연히 유사한 콘셉트의 차량이 개발됐다고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잘 달리고, 뭐든지 해내고, 죽지 않는다
이 차의 저력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 1965년 페이스리프트 버전인 UAZ-452가 출시된 이후입니다. 엔진의 성능이 강화되고 외관 디자인을 일부 수정해 생산성을 높인 것이 UAZ-452인데요. 이 때부터 생산량도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동유럽의 국민 승합차로 발돋움합니다.
UAZ-452는 전장 4,360mm, 전폭 1,940mm, 전고 2,090mm로 길이는 소형차 정도 크기였지만 매우 높은 차량이었습니다. 당연히 이유는 험지 주파력 강화를 위해서였는데요. 최저지상고가 무려 22cm에 달해 웬만한 돌부리나 바위도 거침 없이 통과할 수 있었고, 별도의 스노클 없이 50cm 깊이까지 도하가 가능했습니다.
파워트레인은 UAZ제 2.5L 직렬 4기통 가솔린 엔진과 4속 수동변속기가 조합됐으며, 파트타임 4륜구동 시스템과 저속 기어까지 기본 사양으로 탑재됐습니다. 최고출력은 76마력, 최고속도는 95km/h에 달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볼품없지만 당시에는 제법 준수한 성능이었고, 권장 옥탄가가 72에 불과해 "식용유를 넣어도 달릴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였죠.
사회주의 국가답게 조립 품질은 형편 없었지만, 그럼에도 UAZ-452의 성능은 확실했습니다. 애초에 군용차를 바탕으로 개발된 만큼 내구성과 신뢰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고장이 나더라도 간편하게 고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차량 가격도 저렴해 마구잡이로 굴리기에 부담도 없었습니다.
민수용 차량으로도 판매되면서 UAZ-452는 소련과 공산 진영의 운수 및 물류의 모세혈관 같은 존재가 됐습니다. 봄·가을이면 얼었던 땅이 녹으며 진창이 돼 버리는 시베리아에서도 탁월한 험지 주파력을 선보였고, 뜨거운 사막과 극지대에서도 거침없이 달렸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길에서 모든 용도로 쓰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특유의 둥글면서도 밋밋한 디자인이 마치 커다란 빵 덩어리를 닮았다고 해서 '빵 덩어리'이라는 뜻의 '부한카(Буханка)'라는 애칭도 붙었죠(푸르공은 주로 몽골에서만 쓰이는 애칭으로, 다른 러시아어권 국가에서는 부한카가 더 많이 통용됩니다).
이처럼 다재다능하다보니, UAZ-452는 다양한 파생 모델도 만들어졌습니다. '사니타르카(санитарка, 간호사)'나 '타블례트카(таблетка, 알약)'이라 불리는 앰뷸런스, '갈로바스틱(голобастик, 올챙이)'라 불리는 섀시캡 트럭이 대표적이고, 극지대 주행을 위해 성능을 강화한 버전이나 농업용 트랙터, 대량 수송을 위한 롱바디 등도 개발됐습니다.
용도에 충실한 성능과 극한의 내구성, 다목적성까지 고루 갖췄으니 이 차가 오랫동안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다만 끊임없이 성능을 개선하고 신모델을 출시해 경쟁하는 서방 세계와 달리, 소련에서는 "문제가 없으면 됐다"며 아주 많이, 아주 오랫동안 생산했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죠.
시베리아를 내달리는 불사신
UAZ-452가 출시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57년 전인 1965년입니다. 앞서 다룬 적 있는 피아트 124보다도 1년 빨랐고,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 모델인 포니보다도 무려 10년이나 먼저 출시된 차입니다. 하지만 반세기도 더 지난 현재까지 UAZ-452는 버젓이 신차로 판매되고 있는데요.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생산·판매되고 있는 단일 세대의 승합차이자, 동시에 현재 시판 차량 중에서도 손에 꼽게 오래된 모델입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꾸준히 소소한 업데이트는 있었습니다. 1985년에는 내외장이 대폭 현대화되고 파생 모델이 확대됐으며, 브레이크와 엔진이 개선됐습니다. 엔진의 최고출력은 99마력으로 높아져 최고속도 또한 100km/h를 돌파했습니다.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이 종식돼도 UAZ-452는 살아남았습니다. 2000년대 초에는 사이드미러가 현대적인 형태로 바뀌었고, 현대적인 신규 디자인 시트와 헤드레스트 적용됐으며, 나무로 만들어진 트럭 버전의 적재함이 철제로 바뀌어 내구성이 개선됩니다.
가장 최근의 업데이트는 2011년입니다. UAZ-452 계열 모델 최초로 ABS 브레이크와 유압식 파워 스티어링이 적용됐으며, 엔진은 유로4 배출가스 규제에 대응하는 112마력 짜리 2.7L 가솔린 엔진으로 대체됩니다. 여기에 5속 수동변속기가 조합돼 최고속도는 127km/h까지 높아졌습니다. 물론 아무리 개선이 이뤄져도 원판 자체는 57년 전과 별 차이가 없지만요.
워낙 오랫동안 생산된 모델인 데다 서민을 위한 승합차로 애용됐던 만큼, 동유럽 지역에서 UAZ-452의 위상은 폭스바겐 타입 2 마이크로버스와 비슷합니다. 캠핑카나 승용차로도 애용되며, 동유럽 지역들의 히피 족들은 마이크로버스처럼 UAZ-452에 독특한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뛰어난 험지 주파력과 내구성을 갖춘 만큼 꼭 동구권 지역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성능이 요구되는 지역에서는 UAZ-452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서두에 언급한 몽골은 물론 여러 중앙아시아 국가들, 동남아시아, 중동, 인도, 네팔, 터키, 중남미, 아프리카 등지에서도 많은 UAZ-452가 현역으로 운행됩니다.
심지어 서유럽 국가들이나 일본 등지에도 수출됐는데요. 조악한 품질 탓에 대중적으로 히트를 치지는 못했지만, 특정 용도로는 대체 불가능한 모델인 만큼 현재까지도 이들 국가에 적잖은 팬덤이 형성돼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요? 적어도 아직 UAZ는 이 차를 단종시킬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현재 러시아에서 판매 중인 UAZ-452 중 가장 높은 등급을 선택해도 차량 가격은 고작 우리돈 1,500만 원 수준입니다. 아무리 좋은 신형 밴이 나와도 작고 실용적이며 저렴하기까지 한 UAZ-452를 완벽히 대체할 수는 없겠죠?
물론 환경 및 안전 법규가 나날이 강력해지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요 선진 시장에서 50년이 넘은 차를 계속 판매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UAZ-452는 항상 새로운 차만이 좋은 차는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변화무쌍한 트렌드에 조금만 뒤처져도 불안해지는 요즘, UAZ-452처럼 우직하게 한 우물만 파는 것도 가치를 인정받는 방법이 아닐까요?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