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싱글맘의 비밀친구 이야기
아이의 여정을 지켜보며, 나는 나의 여정을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설소대 수술, 조음장애, 아빠의 부재, 느린 발달...
그 모든 시간을 지나 우리 아이는 홈스쿨이라는 낯선 길 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아이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매일을 고민하고, 기도하고,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한 엄마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엄마라서'가 아니라, '나도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쓰는 글입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 존경합니다. 함께 힘내요!♡
이혼보다 날 더 울렸고, 첫사랑보다 날 더 설레게 한 존재가 있다는 걸 고백하려 한다. 내 엉망진창 30대를 말없이 함께 버텨준 공범이자, 유일한 소울메이트. (그래! 1g의 과장이 있다는 건 인정한다)
오늘은 나의 '떡볶이'에 대해 모든 것을 털어놓으려 한다.
운이 좋게 아이가 일찍 잠든 저녁. 온종일 엄마로 살았던 내가 유일하게 '나'로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전남편과의 통화로 마음이 유독 소란했던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핸드폰을 들었다. 배달 앱의 ‘주문하기’ 버튼이 마치 ‘오늘도 수고했어’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나의 최애, 죠스떡볶이와 김말이튀김 세트.
잠든 아이가 깰까 봐, 나는 숨조차 죽이며 현관문을 열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확’ 하고 코를 찌르는 매콤 달콤한 냄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새빨간 떡볶이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고된 하루의 스트레스와 세상의 모든 매운맛을 대신 맞아주는 나의 충직한 비밀 친구였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채 꾸역꾸역 떡을 삼켰다.
매워서 우는지, 서러워서 우는지도 모를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죠스떡볶이의 지독한 매운맛은, 차마 세상에 내뱉지 못한 내 마음의 매운맛을 잠시 잊게 해주는 마취제였다.
나의 심야식당은 그렇게 비밀 친구와 함께, 조용하지만 소란스럽게 문을 열곤 했다.
시간이 흘러, 내 비밀 친구의 존재를 눈치챈 녀석이 나타났다. 바로 내 아들이었다.
내가 떡볶이를 먹을 때마다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엄마, 그거 맛있어? 난 언제 먹을 수 있어?"
"넌 좀 더 커야 먹을 수 있어. 이건 너무 맵거든."
어느 날, 녀석이 드디어 선언했다.
"나도 한입만!"
결전의 날.
나는 비장하게, 잘 씻은 떡 하나를 녀석의 입에 넣어주었다. 아들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3초의 정적. 이윽고 녀석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하게 흔들렸다.
"엄마! 혀! 혀에 불! 물... 흡...!"
나는 최대한 무심한 표정으로 우유를 건넸다.
(흥, 아들아. 떡볶이가 그리 만만치 않단다.)
"맵지? 억지로 먹지 마."
"아니야! 매운 게 아니라… 날씨가 더워서 땀나는 것뿐이야!"
매운 걸 못 먹는 아들 덕에 온전히 내 자유의 상징이었던 떡볶이. 그날 이후 비밀 친구는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는 달짝지근한 매운맛을 공유하는 떡볶이 메이트가 되었다. 떡볶이를 가운데 두고 "쓰읍- 하-" 소리를 함께 내며 웃는 시간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요즘 나는 건강식을 챙겨 먹으려 애쓴다. 하지만 떡볶이만큼은 내 인생의 예외 조항이다. 포기할 수가 없어서 이왕이면 좋은 재료로 직접 만들어 먹기로 했을 뿐. 그래도 어떻게 울며 먹던 그 밤의 죠스떡볶이를 잊을까.
어느 날, 유난히 지쳐 보이는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던 아들이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엄마."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아이는 잠시 숨을 골랐다.
"... 엄마가 화나는 날엔 꼭 떡볶이 사줄게."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오디오 소리도, 창밖의 차 소리도... 세상이 무음상태가 된 듯, 오직 아들의 목소리만 내 귀를 가득 채웠다. 한 글자 한 글자가 심장에 박히는 것 같았다.
아. 나의 오랜 비밀 친구 떡볶이가, 어느새 이렇게 멋진 아들의 모습으로 자라 내 앞에 와주었구나.
이제는 내가 아이의 떡볶이가 되어줄 차례였다. 아이가 슬픈 날, 기쁜 날,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하고 맛있는 소울푸드 같은 엄마가 되어주겠다고, 나는 다시 한번 마음속에 새겼다.
"아들, 오늘 간식으로 떡볶이 시켜 먹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