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진짜와 가짜를 걸러내는 삶의 필터에 대하여
아이의 여정을 지켜보며, 나는 나의 여정을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설소대 수술, 조음장애, 아빠의 부재, 느린 발달... 그 모든 시간을 지나 우리 아이는 홈스쿨이라는 낯선 길 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아이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매일을 고민하고, 기도하고,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한 엄마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엄마라서'가 아니라, '나도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쓰는 글입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 존경합니다. 함께 힘내요!
인간관계에도 멀미가 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이혼한 지 한참 지나 알게 된 그녀는, 만난 지 6개월쯤 되었을 때 내게 비밀을 고백했다.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는데, 그게 마침 첫사랑이란다.
나는 그녀의 막장드라마에 적당한 리액션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내 눈을 보며, 동지애 가득한 목소리로 비수를 꽂았다.
“너도 남자한테 상처받아봐서 알겠지만...
우린 비슷한 처지 아니니?”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나의 시간과, 첫사랑과 밀회를 즐기는 그녀의 시간을 같은 저울에 올리는 그 놀라운 계산법에 감탄하며 나는 조용히 연을 정리했다.
그 위로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이기적인 방패에 불과했다.
그 씁쓸한 만남 덕분에, 나는 그간의 '달콤한 위로'와 '무조건적인 공감'이라는 헛된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진짜 위로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온다는 것을, 나는 곧 배우게 되었다.
아이를 통해 인연이 된 사람들 중, 유일하게 내 이름을 불러준 여자가 있었다. 모두가 나를 ‘사랑이 엄마’라고 부를 때, 그녀는 처음부터 ‘OO 씨’ 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그 당연한 호칭이 아이를 낳은 후 처음이라, 나는 그 사실만으로도 그녀가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내가 겪은 일에 대해 ‘세상에, 어쩌다…’ 같은 과장된 동정도, ‘다 괜찮아질 거야’ 같은 막연한 위로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는 “근처 볼일 있어 왔는데, 잠깐 내려와 봐요” 하더니, 차가운 내 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반찬 통 여러 개를 불쑥 안겨주었다.
묵직한 유리 반찬 통에서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고, 고소한 멸치볶음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 순간 나는 어떤 대화도, 어떤 질문도 할 수 없었다.
또 어떤 날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나의 얼굴을 쓱 보더니, 내 아이를 향해 말했다.
“사랑아, 오랜만에 우리 집에 가서 우주랑 놀자!”
그러고는 나를 향해 ‘가서 좀 쉬어요’ 하는 눈빛을 한번 보내고는, 쌩하고 아들 손을 잡고 가버렸다.
그날 오후, 나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텅 빈집의 고요함을, 낯선 선물처럼 어색하게 만끽했다. 저녁이 되어 돌아온 아들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엄마, 오늘 진짜 맛있는 고기 먹었어!”
아들의 그 한마디가, 그녀가 내게 건넨 가장 따뜻하고 완벽한 위로였다. 나는 그녀에게서 말보다 강한 위로의 방식을 배웠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담백하게, 상대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킬 수 있는 걸까. 나는 그녀처럼, 그런 어른이 되고 싶어졌다.
사람은 큰일을 겪어봐야 안다는, 어른들의 그 흔한 말이 왜 진리인지 이제는 뼛속 깊이 알게 되었다. 평온할 때는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거센 파도가 덮쳤을 때, 말없이 반찬 통을 건네는 손과, 동병상련을 가장해 상처를 찌르는 혀가 비로소 구분된다.
이혼이라는 혹독한 필터는 내 삶에서 많은 것을 앗아갔다. 동시에 수많은 '아는 사람’을 잃는 대신, 단 한 명의 ‘진짜 내 편’을 선명하게 남겨주었다. 이보다 더 남는 장사가 어디 있을까. 나는 이제 그 한 명의 소중함을 아는 것으로 족하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삶의 견디기 힘든 순간에 와서야 비로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눈을 뜨게 되는지도 모른다. (물론, 배움의 기회는 이제 충분하니 더 이상의 시련은 정중히 사양하고 싶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