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효자였고, 나는 끝까지 남은 사람이었다
# 비 오는 날의 60일
어르신은 나를 쉬게 두지 않았다.
앉아 있으면 불렀고,
서 있으면 또 불렀다.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를 힘들게 한 건 병이 아니라 태도였다.
나는 간병인이었지만,
그분에게는 하루 종일 부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세 번째 간병인이었다.
사흘째 되던 날,
옆 침대 사람들이 나를 불러 세웠다.
“여사님, 여기 오래 못 버텨요.
도망가요.”
그 말을 듣고도
나는 바로 짐을 싸지 않았다.
그날, 나는 어르신에게 직접 말했다.
“엄마, 저 갈까요.
너무 힘들게 하시면 저도 못 하고 가야 돼요.”
병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 뒤로 어르신은
조금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쉼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기저귀는 두 시간 간격으로 갈았다.
어떤 날은 하루 저녁에 열 개를 썼다.
환자가 원하면 소변기를 대고 눕혔다.
새벽 두 시, 네 시.
어둠 속에서 이불을 고쳐주고
장루를 정리했다.
어느 날은 장루가 새어
시트를 모두 갈아야 했다.
어르신은 짜증을 냈고
나는 아무 말 없이 닦고 또 닦았다.
그렇게 60일이 흘렀다.
아들 다섯은 모두 효자였다.
병실에 들어올 때마다
“엄마”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다정했다.
며느리들도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까다롭고 힘든 분이라는 걸.
그래서 자주 말했다.
“계속 부탁드립니다.”
“조금만 더 부탁드릴게요.”
그 말에는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병실 안에서
나는 가족은 아니었다.
나는 기저귀를 갈고,
장루를 정리하고,
새벽을 버티는 사람이었다.
고맙다는 말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그 말은 언제나 부탁과 함께 따라왔다.
우리는 정으로 이어진 사이가 아니라
간병비로 연결된 사이였다.
그 사실이 화가 나기보다
조금 서글펐다.
병원이 옮겨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안도했다.
내 몫의 60일은 다 썼다고 생각했다.
재활병원에 도착해 인계를 마쳤다.
자식들은 각자 차를 타고 이미 와 있었다.
병원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내 차가 있는 처음 병원으로 돌아왔다.
운전석에 앉았을 때
문득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이게 내 일이지.
나는 또 그렇게
내 자리로 돌아온 사람이었다.
비가 오니 그날이 생각난다.
그 60일은 아직도 내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