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중순. 서울 중앙지방검찰청.
한울 정신재활원 연쇄 살인 사건은 김도윤에게 깊은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최면'이라는 섬뜩한 키워드를 손에 쥐고 있었지만,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그 어떤 실마리도 잡을 수 없었다. 그의 능력 '잔류 사념'은 진실을 속삭였지만, 그 진실을 법정에 세울 증거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건 브리핑은 매일 같이 이루어졌지만, 수사팀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피해자들의 사망 원인은 여전히 심장마비로 명확했지만, 그들의 얼굴에 남아있던 극심한 공포와 정신적 고통은 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했다. 밀실 살인이라는 점과 CCTV에 찍힌 희미한 그림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수사팀은 온갖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진행했지만, 그 어떤 단서도 '최면'과 연결시킬 수 없었다.
"김 검사님, 현장에서는 어떤 물리적인 침입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CCTV도 너무 희미해서 사람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고요. 피해자들이 모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점은 일치하지만… 어떤 외부적인 요인으로 심장마비가 유발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독극물 반응도 전혀 나오지 않았고요."
수사팀장의 보고는 김도윤의 고뇌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는 이미 '최면'이라는 핵심 단서를 쥐고 있었지만, 그것은 법적 증거로 입증할 수 없는 초현실적인 영역이었다.
김도윤은 최면 전문가를 찾아가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최면 치료사들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 검사님, 최면은 의식적인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물론 강력한 최면술사가 존재할 수는 있지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의 강력한 최면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물리적인 접촉 없이 원격으로 그렇게 강력한 최면을 거는 것은… SF 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전문가들의 답변은 김도윤의 확신을 더욱 고립시켰다. 그들은 그의 이야기가 허황된 망상처럼 들리는 듯했다.
수사팀 내에서는 점차 회의적인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일부 수사관들은 김도윤이 너무 비현실적인 가능성에 매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내부 소행이나 심장마비에 대한 다른 물리적인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김도윤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피해자들의 잔류 사념 속에서 '최면'의 흔적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공포와 절망, 그리고 들려오는 속삭임은 환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능력이 알려준 진실이었다.
강재혁 경감은 김도윤의 이러한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며 더욱 의심을 굳혔다.
'김 검사는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거지? 저렇게까지 '최면'에 집착하는 이유가 뭘까? 분명히 뭔가 숨기고 있어. 일반적인 검사의 판단이 아니야. 그의 '능력'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해.'
강재혁은 김도윤의 모든 행동을 예의주시하며,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초월적인 정보'를 얻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의 의심은 점차 '비질란테' 조직에 대한 확신으로 변해갔다.
김도윤은 지쳐갔다. '최면'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수사를 진행하려 했지만, 법적 증거로 입증하기는커녕 관련 전문가를 특정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일반적인 수사 방식으로는 명확한 한계에 부딪혔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피해자들의 비명과 함께 범인의 섬뜩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그의 몸은 더욱 피폐해졌고, 잠 못 이루는 밤은 그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밤늦은 시간, 김도윤은 결국 유하준을 찾아갔다. 그의 오피스텔 문을 두드렸을 때, 유하준은 여전히 모니터 불빛 아래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지쳐 보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라면 봉지와 커피 컵이 쌓여 있는 방은 여전히 그의 작업 공간이었다.
"유하준 씨… 급한 부탁이 있습니다."
김도윤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그는 평소의 냉철한 검사의 모습이 아닌, 한계에 다다른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유하준은 고개를 들어 김도윤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김도윤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김도윤의 표정은 마치 깊은 수렁에 빠진 듯 보였다.
"또 그 '최면' 때문입니까? 당신 얼굴이 말이 아니군요. 내가 경고했을 텐데요. 그 사념은 당신을 노리고 있습니다."
유하준은 김도윤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넸다.
김도윤은 커피를 받아 들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우회적인 방법으로 유하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그는 유하준이 자신의 비밀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구체적인 능력을 언급하지 않고도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유하준 씨, 저는 지금 일반적인 수사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벽에 부딪혔습니다. 범인은 물리적인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람의 정신을 조종해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제 '직감'으로는 분명히 '최면'이나 '정신 조작'과 관련된 능력이라고 확신합니다."
김도윤은 자신의 '직감'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유하준에게 비상식적인 요청을 했다.
"그래서… 비공식적으로 당신의 능력을 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최면', '정신 조작'과 관련된 특정 분야의 전문가 리스트와 그들의 과거 행적, 그리고 관련 학회나 단체 정보를 비공식적으로 조사해 주십시오. 합법적인 경로가 아닌, 당신의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들이 과거에 어떤 연구를 했는지, 어떤 실험에 가담했는지, 은밀한 집단과 연관되어 있지는 않은지… 모든 것을 찾아야 합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매장되었거나, 비밀스러운 연구를 했던 이들에게 초점을 맞춰 주십시오."
김도윤의 요청은 법의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개인 정보 침해는 물론, 불법적인 정보 수집이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유하준은 김도윤의 말을 듣고 눈썹을 치켜떴다. 그의 눈빛에는 다시 한번 깊은 의심이 드리워졌다.
'확실히 비상식적이야. 저렇게 구체적으로 '최면', '정신 조작'이라는 키워드를 확신하는 이유가 뭘까? 게다가 '과거 행적', '비밀스러운 연구', '은밀한 단체'까지… 이건 단순한 직감이 아니야. 그는 정말로 사념을 '보는' 건가? 이 남자… 정말 괴물이다.'
유하준은 김도윤의 정보 요구가 '비상식적'임을 다시 한번 인지하고 그의 비밀에 대한 의심을 심화했다. 그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는 김도윤의 확신을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유하준은 고통스러워하는 김도윤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눈빛 속에는 피해자들을 향한 깊은 연민과 함께 악을 뿌리 뽑으려는 처절한 진정성이 담겨 있었다. 김도윤은 자신을 갉아먹는 능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강철 같은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유하준은 그런 김도윤의 모습에 알 수 없는 매력을 느꼈다. 자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의를 추구하지만,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강렬한 열정을 가진 남자였다.
유하준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김도윤의 요청은 그의 해킹 실력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일이었다. 그는 단순한 범죄자를 넘어, 아마도 '최면'이라는 초능력을 가진 다른 '괴물'을 상대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 역시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좋습니다, 김 검사님. 당신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까지 이 사건에 집착하는 겁니까? 단순히 검사로서의 의무감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능력'이 당신에게 시키는 겁니까?"
유하준은 김도윤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실을 알고자 하는 갈증이 담겨 있었다.
김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피해자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마지막 순간의 공포를… 저는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악마가 이대로 방치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을 것입니다. 법이 그들을 막지 못한다면… 제가 나서야 합니다. 그게… 저의 운명인 것 같습니다."
김도윤은 자신의 '운명'이라는 단어에 묘한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는 유하준에게 자신의 능력을 직접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유하준은 김도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김도윤의 진심을 느꼈다. 그가 가진 능력의 실체는 여전히 미스터리했지만, 김도윤이 추구하는 정의에 대한 열정만은 진실이었다. 유하준은 컴퓨터 화면을 응시했다. '최면', '정신 조작', '비밀스러운 연구'…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정보를 찾아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이 길은 위험합니다. 당신의 능력도, 저의 능력도, 모두 양날의 검입니다. 그리고 그 악마는 당신을 유인하고, 당신을 파괴하려 들 겁니다.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십시오. 저를 믿으십시오. 저는 당신의 그림자가 되어드리겠습니다. 이 어둠 속에서 당신의 등불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유하준은 김도윤에게 다시 한번 굳건한 신뢰를 보냈다. 그의 시니컬한 얼굴에는 드물게 비장함이 깃들어 있었다.
김도윤은 유하준에게 고개를 숙였다. 유하준은 김도윤의 고독한 싸움에 유일한 빛이 되어줄 존재였다. 법적 증거로는 밝힐 수 없는 초현실적인 악을 상대하기 위해, 김도윤은 이제 유하준의 천재적인 디지털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했다. 유하준의 도움 없이는 이 미궁 같은 사건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절감했다.
그날 밤, 유하준은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밤샘 작업에 돌입했다. 그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쉴 새 없이 움직였고, 수십 개의 모니터 화면에는 방대한 데이터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는 인터넷의 가장 깊은 심연, 다크 웹과 은밀한 네트워크를 탐색하며 김도윤이 요청한 '최면', '정신 조작' 관련 전문가들의 리스트와 그들의 과거 행적, 그리고 관련 단체들의 정보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전에 '블랙 스크린'을 찾아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위험한 영역으로 침투해야 했다.
강재혁 경감은 김도윤이 밤늦게 유하준의 오피스텔을 방문했다는 보고를 받고 더욱 의심을 굳혔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비질란테'라는 그림자 조직의 퍼즐 조각이 하나씩 맞춰지고 있었다.
'김도윤 검사… 그리고 유하준… 이 두 사람이 뭉쳤다. 그들의 능력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그리고 이들이 추구하는 정의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것인가?'
강재혁의 추격은 이제 김도윤과 유하준,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낼 '그림자 조직'의 실체를 밝히는 데 집중되었다. 한울 정신재활원의 비명은 두 명의 '비질란테'와 한 명의 집요한 경찰 사이의 위험한 추격전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김도윤의 정신을 잠식하는 공포는 계속될 것이고, 유하준은 그 어둠 속에서 유일한 등불이 되어야 했다. 그들의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