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영원히 기억되기를

영화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2012)> 리뷰

by 더 레터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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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렝 레네의 질문: 기억과 망각과 죽음이란?

전달을 거쳐 참여로, 예술이 질문하는 방식

예술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해 왔다. 고대의 벽화부터 중세의 구전을 거쳐, 이야기라는 매체를 빌려 우리 곁에 전해 내려온 예술 작품들은 필름에 상이 맺힌 채로 박제되고, 완벽히 보존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예술은 전달과 질문이라는 기능을 동시에 수행해 왔으나, 현대에 이르러 관객과의 대화적 관계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 예술가는 자신의 주관적 신념과 미학적 신념을 관객에게 온전히 드러냄으로써 그들에게 자신의 생각에 대해 의견을 구한다. 관객의 참여를 불가결로 한 현재의 예술의 기조- 참여형 예술(Participatory Art)과 대화적 예술(Dialogical Art)-는, 관객이 자신의 작품을 보고 그들의 뇌리에 새겨진 의문에 답을 하는 순간 비로소 작품은 완성된다고 시사한다. 시간이 흐른 뒤, 예술관객에게 전달하는 존재가 아니라 질문하는 존재로 거듭나게 되며, 관객은 단순한 소비자에서 벗어나 작품 창조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생산자로 변모하게 된다.

즉 영화는 예술을 전시하는 일종의 캔버스이자, 그 작품이 탄생되기까지 거쳤던 수많은 고뇌의 시간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또한 예술 사조들의 변화에 발맞추어, 영화도 직접적 메시지 전달을 중시하는 고전적 영화 문법에서 관객의 능동적 해석을 요구하는 현대적인 서사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나 영화는 다른 예술 작품들에 비해 대중들과의 접점이 더욱 빈번하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감독의 질문은 더욱 빠르고 멀리 퍼져 나간다. 이러한 기조는 이후, 질문을 직접 건네기보다는 관객의 사유를 자극하는 현상과 대상의 민낯을 렌즈 속에 담아, 관객 스스로가 질문을 건네고 그에 해당하는 답을 말하게 만든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극중극이라는 소재를 바탕으로 예술가의 인생을 노래하며,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은 비로소 죽음으로 완성됨을 시사한다. 알렝 레네는 <히로시마 내 사랑(1959)>, <밤과 안개(1956)> 등 본인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소재인 ‘기억과 망각’이라는 개념들과, 그것이 품은 여러 역사적 트라우마들로 인해 시들어가는 수많은 이들의 순간들을 화면 구도와 인물의 시선, 여러 메타포들을 통해 조명한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죽음이라는 존재와, 그것을 대면하기 두려워하는 이유인 기억과 망각이라는 소재들의 명암을 세밀하게 포착하여 영상으로 구현했다. 이를 더욱 효과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그는 ‘영속성’이라는 성질을 기억과 망각에 부여하여- 동일한 연극을 다른 세대의 배우들이 공연하고, 그들의 연기를 병렬적으로 교차함으로써- 그것들이 지닌 시간을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오르페우스가 결국 에우리디케를 향해 돌아본 순간. 그 순간 죽음이라는 존재가 그녀의 손에 닿아 그녀를 저 어두운 심연 속으로 끌고 들어가기 직전, 죽음과 대면하는 그는 이 세상 누구보다 삶의 아름다움을 목놓아 부르짖을 단 한 명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시놉시스

무덤 너머에서 유명한 극작가 앙뜨완은 그의 연극 '에우리디스'에 수년 동안 등장해온 모든 배우들을 불러 모은다. 그렇게 앙뜨완의 성에 도착한 이들은 젊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에우리디스' 영상을 보게 된다. 그리고 곧, 이들에게 놀라운 일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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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기억과 망각의 명암을 바라보다

이 영화는 장 아누이의 연극 <에우리디케>를 원작으로 삼아, 레네 감독은 고전적 오르페우스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신화 속 캐릭터를 현대의 배경으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일순간으로 축약해서 본래 이야기가 가지는 뜻과는 차별되는 메시지를 영화 속에 포함시킨다. 특히나 오르페우스(랑베르 윌슨, 피에르 아르디티 역)가 에우리디케(사빈 아제마, 안 콩시니 역)를 향해 돌아본 순간은 단순한 금기의 위반이 아니라 ‘망각’이라는 인간적인 한계로 재해석한다. 무슈 앙리(마티와 아말리크 역)가 오르페우스를 에우리디케에게 데려다 준 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가 뒬락(이뽈리뜨 지라르도 역)과 나눈 그녀의 사랑에 대한 진실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다. 새벽녘 기차역의 어두운 조명은 배경의 뒷부분을 그림자 속에 사라지게 하여 마치 지옥의 입구에서 고뇌하는 신화적 면모를 부각시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뒤돌아보게 된 것은 신화처럼 본인이 지옥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뒤를 돌아본 안일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에우리디케가 추위와 고통을 갈구하며 뒤에서 그를 끌어안을 때, 그가 아직 그녀를 사랑한다는 진실된 마음을 ‘망각’하지 않을 때. 즉, 그의 변하지 않는 사랑의 맹세가 온전한 형태를 갖추었을 때 이를 그녀에게 전달해 주고 싶은 그의 욕망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는 이 작품의 제목처럼, 작중 앙뜨완(드니 포달리데스 역)의 유언을 이행하러 온 여러 배우들은 실제로 작품을 관람하며 연기를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억 속 스스로가 연기를 했던 순간들을 관객이 상상하며 관람했던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의 주요한 키워드이자 서사를 이끌어가는 ‘보기(seeing)’라는 행위는 관객을 등장인물들의 기억으로 데려다 주는 장치이자, 어쩌면 미완성처럼 보이는 후반부 서사의 여러 점프 컷 사이의 공백이나, 원작과 극중극인 <에우리디스>의 차이점들을 ‘보게 된’ 관객이 이를 스스로 상상하게 만든다.

배우들은 각각 자신이 과거에 맡았던 배역을 기억에 따라 재현하며, 세대·나이·해석이 다른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가 한 무대(혹은 한 영화) 안에서 서로 공존한다. 특히, 젊은 배우들이 직접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리허설 영상 속’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이를 회상하는 이 작품의 전체적인 구조는, 스토리가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구성된 요소라고 착각하게끔 만든다.

하지만, 이 영화이자 회상되는 연극의 스토리 자체가 관객에게 건네는 메시지인 것이다. 특이하게도 두 쌍의 주연이 교차하며 연기하는 장면에서 유일하게 같은 배역을 맡은 사람은 바로 무슈 앙리. 즉, 하데스이다. 그는 에우리디케를 만나게 할 유일한 방법인 죽음을 오르페우스에게 전달하기도 하나, 오르페우스가 그의 아버지(미셸 피콜리역)의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에 분개할 때 그에게 사랑했던 그녀와 그의 짧은 하룻밤의 기억을 언급한다. 이 씬에 도달하기까지, 레네 감독은 저택의 방과 문, 화면, 객석 등의 오브제들의 위치를 통해 미장센 내부에 수 많은 프레임을 숨겨 놓는다. 이러한 미장센의 구성은 배우들에게 추억 속 공연장과 동일시되어 기억과 망각의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이미지로 재형성한다. 즉, 프레임들은 기억을 불러오는 객체일 뿐이며, 작품의 초반을 이끄는 마르슬랭(안제이 세베린 역)이 과거의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영상을 재생하고 향수에 빠져 있는 모습을 통해 극중극 그 자체와 그것을 바라보는 과거의 인물들을 지켜 보는 이 모든 이들이 결국 망각과 기억 사이를 거닐며 과거를 재구성하는 스토리임을 알 수 있다.

과거의 향수에 떠 밀려온 기억들은 그들이 마치 스스로의 무대 속으로 빠져 든 것은 그들의 현재 상황과는 전혀 연관되지 않은 독자적인 감상인 것처럼, 캐릭터들이 처한 시간과 공간 사이의 유기적 연결을 분리당한 채 해체당한다. 해체당한 기억은 ‘실제의 운동과 시간 속에 스며들어 있는 부피’로써 우리에게 기억된다. 즉, 시공간으로부터 벗어난 그들의 행위만이 어렴풋이 다시 재생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행위는 우리의 일상 모든 순간에 등장하여, 마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시간의 연속체로써 존재한다.

이러한 ‘기억’의 특성에 연관되어, ‘망각’은 단순히 기억을 잊어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의식 속 세계에서 유기적으로 분리되고 해체된 기억들을 풍화되고 변성되게 만든다. 하지만 망각으로 인해 해체된 기억들이 변질됨으로써, 변화된 기억들이 과거와 현재가 함께하며 미래적 계기까지 함축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으로 재구성될 수 있도록 작용한다. 이는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일반적인 작용이다. 즉,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고 망각한다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임을 시사한다. 기억과 망각은 단순한 이분법적 경계가 아니라, 과거의 행위로부터 시공간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일종의 순환과도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기억과 망각은 해체된 행위와 그 속의 감정들이 가진 모든 빛과 어둠을 떠올리게 하며 잊게 만든다. 이는 작품 후반부 에우리디케가 소멸하기 전의 회상 씬이나, 무슈 앙리가 오르페우스에게 에우리디케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는 씬들을 통해 기억과 망각을 극중극의 서사 구조뿐만 아니라 이를 회상하는 캐릭터들에게 영화적으로 구체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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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하여

‘영속성’. 죽음이 예찬하는 흔적들

레네 감독에게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완성’의 의미를 가진다. 이는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공통적인 점이 나타난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이 그의 사후 평가가 올라간 것,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가 라디오에서 많이 들리던 일화나, ‘forever 27 club’의 로버트 존슨, 지미 헨드릭스, 커트 코베인을 지나 에이미 와인하우스까지. 앙뜨완의 경우 두 번의 죽음을 통해 이 작품에 등장했던 배우들이 이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체감하고, 이후 영원히 기억될 ‘에우리디스’라는 작품을 얻는 스토리를 지닌다. 즉, 창작자의 죽음으로 작품은 ‘영속성’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레네 감독이 이야기하는 영속성은 ‘전승’과도 같이, 유한성을 지닌 존재가 지속적으로 재창조되고 변형되어 이어짐을 이야기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매체가 바로 예술과 기억이다.

기억은 죽음을 맞이함으로써(망각됨으로써) 그 존재가 사라지지만, 예술로써 승화된 기억은 그렇지 않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배우들이 과거의 자신을 생생히 되짚어 볼 때, 그리고 그들의 기억을 다시 마주하게 만든 화면 속 배우들의 연기는 예술로써 승화된 기억이 되살아나며 또한 후대에 전승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들의 기억은 테세우스의 배와 같이, 기억 속 수많은 조각들이 변질될 수 있음을 긍정한다. 레네 감독은 그 변질된 조각마저 기억의 일부분임을. 그리고 그 기억은 영원히 예술로써 남아 있음을 따스하게 말한다. 에우리디스가 극작가 앙뜨완과 13인의 배우들로부터 남겨 진 무대 위의 흔적은 지속되는 것처럼,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현실의 세계에서 ‘죽음의 공간’으로 이미 사라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기억의 장소로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의 만남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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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것들

결국 이 영화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허무하게 끝난 두 번의 죽음과 새벽녘 산 속으로 향하는 오르페우스의 뒷 모습을 비추는 스크린 사이의 공백일까. 죽음으로 영원히 함께 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에우리디스'와 앙뜨완일까. 알렝 레네 또한 자신도 기억과 사랑, 망각과 죽음 등 수 많은 것들에 대해 정확히 무엇을 '봤는 지' 알 수 없었다는 한탄이 담긴 제목일 수도 있다. 또한 우리가 느끼는 삶과 경험들을 과연 우리가 진실되게 보았는가라는 경각심을 지닌 태도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레네 감독은 죽음으로 인해 보기라는 행위를 멈추게 되는 두려운 순간에 대해 안온한 태도로 이를 긍정한다. 그저 허무하게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예술과 사랑을 통해 죽음을 넘어서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라는 투쟁을 시도한다.

결국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는 문장은 알렝 레네 감독이 스크린의 불빛이 꺼진 후 화면 속에 비친 관객에게 "보여지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적극적으로 해석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라" 는 의지를 담은 희망찬 응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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