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2017)> 리뷰
역사란 검증된 사실이자, 입으로 구전되어 온 이야기이다. 여러 세대를 거친 세상의 다양한 문학 작품들은 신화나 역사 등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생성된 경우도 허다하다. 오죽하면 여러 이야기들을 만드는 방식을 빗대서 설명할 때 고전을 주로 사용하니까. 달리 말하자면, 역사는 원료에 가깝다. 시간이 흘러 기술이 발전하고 인류의 문명이 고차원화될수록 인류는 원료에서부터 가공을 통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즉, 역사도 이야기라는 포맷을 통해 그것의 원료로부터 재미라는 요소를 추출하여 여러 매체에 실렸다는 뜻이다. 이렇게 역사에서 추출된 이야기들은 ‘주제’로써의 사실이라는 그것의 존재 이유와 달리 ‘소재’라는 감정선을 바탕으로 가공된다. 특히나 한국의 여러 사극 영화들은 있는 그대로의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진 감정선을 ‘소재’로 하여 여러 메시지나 재미 요소를 첨가한 합성물로써의 역사를 향유한다. 이것은 결국 ‘기록’으로써의 역사가 가진 냉철함을 억지로 가열시킨 것과 진배없다.
역사는 결국 생존자들의 이야기이며, 승자들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듯, 역사는 전승자들의 기록 속에 내재된 감정의 관성이 존재한다. <박씨부인전>과 같이, 패배자로써의 역사는 이를 전달할 때 보편적인 사실보다는 결과로 인해 얻게 된 여러 낯부끄러운 감정들을 바탕으로 관객들에게 이미지를 굳힌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하얼빈>보다 더욱 강하게 이러한 흐름을 거스른다. 이 영화는 누구보다 예리한 시선으로 병자호란이라는 사건을 묘사한다. 이는 타임라인으로써의 거시적인 역사의 흐름이 아니라, 남한산성에서 벌이는 최후의 항전을 견디는 그 모든 사람들의 갈등을 미시적으로 바라본다. 그와 동시에 슬픔이라는 감정이 가지는 강력한 관성으로부터 우리를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게 하여 동정이라는 느낌 보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각자의 입장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여러 인간 군상을 응시한다.
1636년 인조 14년, 청나라의 칸은 자신을 황제로 지칭한 다음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에 불응한 조선에 맞서 청은 10만 대군을 몰고 조선을 침공한다. 강화도로 피난을 가던 인조(박해일 역)는 길이 막히자 중간에 남한산성으로 잠시 몸을 피한다.
길고 추운 겨울, 식량은 떨어져 가고 백성들도 추위에 몸서리치는 가운데,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이병헌 역)과, 명나라와의 예를 저버리지 못해 저항하자는 김상헌(김윤석 역)은 서로 대립한다. 여러 번의 전투가 오가며 병사들은 전투로 목숨을 잃어가고, 말들도 고기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등 점점 사태는 심각해져 간다. 그러던 와중, 청나라의 황제가 이곳에 직접 도착했다는 소문이 성 내에 퍼지기 시작하는데…
'정치 스릴러'라는 장르는 양극단의 두 인물들이 각자의 입장을 위해 서로를 적대시하는 이분법적 구도가 필수적이다. <공동경비구역 JSA>나 <살인의 추억>, <모가디슈> 등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대립을 소재로 선악 구도를 모호하게 조성하는 영화들은, 인물들을 양분하는 장소나 소품 등을 배치하여 프레임을 분할하거나, 관객들의 시선이 움직이는 방향을 유도하거나 방해하곤 한다. 이는 또한 <1987>이나 <택시운전사>처럼 권력과 인물이라는 다윗과 골리앗이 생각나게 하는 서사적 구도에서는 세로축을 은유하는 오브제를 배치하는 등의 형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대립'을 그리는 영화가 아니라, 같은 해결 방법과 목표를 가진 두 인물의 목적의 차이로 인해 서로를 이해하는 영화이다. 이러한 기존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를 변주시키기 위해서는 양극단에 있는 두 인물의 특징을 중화시킬 필요가 있다. 황동혁 감독은 답답한 결정을 내리는 김상헌에게 나루(조아인 역)를 통한 부성애와 인간미를 부여하고, 서날쇠(고수 역)와의 소통 장면을 통해 신념과는 구별되는 실리를 주장하는 인물임을 보여주게 된다. 이와 반대로 화친이라는 최소한의 인명 피해를 종용하는 최명길이라는 인물은 '선한' 이미지를 줄 수 있게 만드는데, 주변 인물들의 냉대와 인조의 고뇌를 끌어안은 채로 적진 한 가운데서 목숨을 위협받는 이미지를 부여하여 관객과 최명길 사이의 감정적 연결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가 뒤흔들리면서, 제3세력인 '천민'을 통해 중화된 서사의 이분법적 구도를 동질화(나쁘게 말하면 완벽한 '혼탁화')시킨다. 특히 '서날쇠'라는 캐릭터가 조서를 들고 남한산성에서 내려감으로써, 최명길과 김상헌 두 인물은 모두 말로써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하며 그것이 조정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으로 헌신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두 사람은 '글로써 이루어내는 방안'이라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신념을 가진 인물들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더불어 '조서'라는 오브제에 의해 권력을 양도받은 서날쇠는 도원수(도용구 역)로부터 목숨을 위협받은 후 결국 칠복(이다윗 역)을 잃는다. 이는 항쟁과 명분이라는 개념으로써의 전쟁이 아니라, 그것에 직접 참여하는 병졸의 입장으로써 전쟁의 참혹함과 무의미함을 보여준다.
<남한산성>은 일체화된 구도로써 서사를 단정짓지 않는다. 카메라에 얼굴을 비춘 모든 사람들은 황동혁 감독에 의해 '상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다. 인조, 김류(송영창 역), 이시백(박희순 역)의 수직 관계를 통해 위계 질서에서 발생한 고위 권력자들의 오판과 이를 직접 감내하게 되는 하층 세력간의 대비를 세로축으로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의 서사적 대립 구조는 마치 십자 모양과도 같이 변하게 된다. 또한 적대 세력인 정명수(조우진 역)와 용골대(허성태 역), 그리고 칸(김법래 역)은 관객보다 더욱 높고 거대한 시선을 지닌 채 인조를 내려다본다. 그러나 외세라는 스토리상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에게도 신분제의 부당함에 대한 비판이나, 인물의 역할 의식에 대한 존중을 부여하여, 오랑캐에게 예절을 지적당하는 아이러니한 조선의 조정과 허례허식에 대한 은유적인 냉대를 새겨 넣는다.
<남한산성>은 상징으로 결속된 영화이자, 상징이 이끌어 나가는 영화이다. 또한 여러 상징들은 각자의 색을 지니며, 의미를 부여받은 여러 색들은 스크린에서 다양한 인물들에 의해 그 뜻이 변주되거나 뒤섞이게 된다.
김상헌은 극의 시작부터 죽음을 불러온다. 그는 대의명분이라는 개념을 중시하는 인물이었으나, 그 커다란 뜻을 지탱하기에는 수 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그는 상복과도 같은 흰 옷으로 갈아입고 작중 중반부터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흰 색은 추위를 불러 오는 지옥의 전령이자 죽음의 상징이 되었다. 김상헌은 죽음 그 자체를 입은 채 여러 군졸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비록 그들의 건의를 듣는 유능한 고위층이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사신으로써 적군과 아군 모두를 새하얀 눈밭의 고깃덩이로 만들 뿐이었다. 그리고 김상헌은 작중 후반부, 나루를 서날쇠에게 맡기며 대의를 지키지 못한 대가와, 옛 것이 사라져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 아래에서 스스로에게 죽음을 선사하게 된다. 사신이 죽고 난 후 비로소 흰 색은 '망각'이라는 자신의 가장 순결하고도 고귀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눈이 녹아내리고 나서야 봄이 온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 때가 되어야 비로소 전쟁으로 인한 상흔이 아물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작중 모든 글은 그 몸뚱이에 의미를 지닌 채 멀리 퍼져나가기를 기원한다. 전쟁을 부르는 김상헌의 글이나, 화친을 부르는 최명길의 글이나, 그 모든 글들은 결국 전달됨에 의해 그 소명을 다하게 된다. 결국 '글'에게는 '길'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스스로 그 의미를 보내기 위해 죽음을 각오한 서날쇠와 최명길의 발걸음은 당사자가 직접 움직인다는 정성의 차이로써 구분되지 않는다. 아군이 막아내며, 적군이 진격하는 길이라는 존재는 그 반대급부와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변화를 종용함에 있어 그 가치를 입증한다. 즉, 의미를 담은 글자는 글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떠나보내는 모든 길을 따라 수 없이 걸어 간 발자국은 '속죄'와도 같다. 길을 따라 성안에 들여 온 나루는 김상헌의 죄책감을 받아든 채로 눈이 녹은 봄날의 풀밭 속에서 햇빛과 그것의 온기를 만끽하는 씬은, <남한산성>이라는 수없이 예리하고 차가운 영화 속 유일하게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황동혁 감독은 민족의 수치와 치부를 가감없이 보여주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모든 폭력과 전쟁의 덧없음을. 그리고 그 너머의 회복을 바라는 이야기를 그리기 위해 병자호란이라는 소재를 빌린 것이다.
마치 생명의 순환과도 같이, 역사는 끊임없이 흐른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우리는 과거와의 끝없는 성찰 속에서 스스로의 오판이나 방점을 발견하곤 한다. 수 많은 역사와 이전의 기록이 여러 매체를 통해 셀 수 없이 변화하여 등장하기도 한다. 때로는 특정한 의도를 가진 자들에 의해서 비틀려지거나 그 사실로부터 배우면 안되는 것들마저 들고 태어나는 여러 작품들도 허다하다. 하지만 과거를 재가공해서 빚어낸 사극은 그때의 문화적 고증을 뜯어보기 위한 장치나 선전물이 아니다. 사극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그 모든 선조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즉, 수 없는 길을 따라 넘어간 모든 글들이 쌓이고 쌓여 우리 앞에 당도한 역사이자 시간이 된다. 때로는 망각하거나 잃어버릴 수 도 있는 우리의 역사를 되새기는 이유는, 과거의 예시를 통해 현재를 판단하며 결국 미래를 위해 대비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변모하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