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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글 Jan 10. 2024

잊지 못한다, 잊을 수 없다-'작별하지 않는다'

[서평]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한강 작가의 책은 유난히 첫 장을 넘기기 어렵다. "소년이 온다"가 너무 강렬해서 그랬을까. 책 뒤편 '제주 4·3' 사건을 주제로 만들었다는 구절을 보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오래 걸리려나, 또 얼마나 마음을 욱신욱신하게 만들까.


사실 독서모임에서 정해진 책이라 약간의 강제성을 띄고 의무감에 개시한 책이긴 하다. 나는 어른이고, 내 몫은 해야 하니까.







작가인 경하는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소설을 쓴 뒤부터 악몽을 꾼다. 수많은 무덤을 바닷물이 덮치려 하는 꿈. 경하는 이 꿈을 친구인 인선에게 말한다. 다큐멘터리 작가인 인선과 경하는 이를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자 약속한다. 하지만 서로의 시간이 맞지 않아 다큐멘터리 제작은 차일피일 미뤄진다.


경하는 하루하루 유서를 반복해서 쓸 정도로 말 그대로 '버텨가며' 삶을 살아가고 있고, 인선은 엄마(정심)의 병간호를 위해 제주도로 내려갔다. 엄마는 돌아가셨지만 인선은 제주도에 그대로 남아 목공일을 하며 살아다.


각자의 삶을 살던 중 인선에게 연락이 온다. 손가락이 잘려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와줄 수 있냐고. 병원으로 달려온 경하에게 인선은 자신이 키우는 새를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오늘 꼭 물을 줘야 살 수 있다는 인선의 말에 경하는 그날로 제주도 인선의 집으로 간다.


폭설 때문에 갖은 고생을 하며 인선의 집에 도착한 경하. 하지만 새는 이미 죽어 있었다. 경하는 그 집에서 인선이 자신과 만들기로 했던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폭설로 인한 추위, 절전에 힘들어하던 경하의 앞에 인선이 나타난다.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경계 속에서 경하는 인선에게 4·3 사건을 겪었던 정심의 이야기를 듣는다.






작별

작별이 이별과 다른 점은 스스로 행한다는 점이다. 만들 '작'이 붙은 작별은 스스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는 의미이다. 반면 이별은 서로 갈리어 떨어짐이라는 뜻으로 외부의 원인이 작용해 떨어졌음을 미한다.

학살이라는 엄청난 사건은 시간이 흘러서, 혹은 직접적인 관계자가 아니라서 서서히 잊혀지고 있다.

하지만 가족의 죽음을 확인하고도 살아가는 정심, 정심과 그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경하와 인선을 통해 작가는 우리의 역사와 작별할 수도 없고, 작별하지도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힘껏 말하고 있다.



소설 속 대부분의 배경을 차지하는 눈은 다중적인 의미로 해석이 된다. 인선의 엄마(정심)에게 눈은 생명을 분별하는 수단, 가족을 떠올리게 하는 소재이다. 죽은 오빠의 시신을 확인할 때 내렸던 눈, 죽은 사람의 얼굴 위에 앉은 눈은 녹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 눈이다.

인선과 경하에게는 정심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으로 많이 묘사된다. 눈은 순환하는 물이기에 정심이 그때 당시 맞았던 눈을 자신들이 맞고 있을 수도 있다는 표현을 한다. 즉 어머니의 경험을 공유하는 그 순간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경하에게는 극복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루하루 유서를 쓰고 삶을 포기하려 했던 경하이지만, 인선의 부탁을 받고 엄청난 폭설을 뚫고 마침내 인선의 집에 당도한다.




서사가 어떻고, 경하와 인선 중 누군가가 죽은 것인가, 현실은 어디고, 그래서 결말이 어떻게 된 것이고 등등 논리적인 시각으로 책을 살피는 것은 굉장히 무의미하다.


다만 소설 속 포기하지 않은 경하와 인선, 정심이 떠오른다. 매일매일 죽기로 결심했지만 인선의 전화를 받고 제주로 간 경하, 엄마를 여의고 손가락이 절단됐지만 끝끝내 고통을 참아내는 인선, 4·3 사건을 겪으며 오빠와 남편을 잃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행동한 정심까지.


기억 속 흐릿하게 남아있던 처참한 역사가 경하, 인선, 정심으로 되살아나며 한기가 느껴진다. 익숙하지 않은 제주 방언들이 귀에 맴돈다. 사력을 다해 남긴 작가의 메시지가 눈과 함께 생생하고도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겨졌다. 이 모든 것들과 작별해서는 안된다.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45쪽


시작하고 싶을 때 시작해.
뭐, 일단 나는 계속하고 있을 테니까.
그 말이 주문처럼 나를 안심시키곤 했다.
51쪽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57쪽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134쪽


꿈이란 건 무서운 거야.
소리를 낮춰 나는 말한다.
아니, 수치스러운 거야.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을 폭로하니까.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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