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담근 동치미의 비밀
“여보, 야채 필요한 거 없어요?”
“당근 하고 양배추 좀 가져다주세요.”
남편은 시골 생활을 하면서 늘 싱싱한 야채를 한가득 싣고 온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면 대문 앞에는 정성껏 모아 온 야채들이 옹기종기 쌓여 있다. 옷을 갈아입고 하나씩 봉투를 열어 야채를 다듬어 냉장고에 소분한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남편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늘 넉넉한 양을 가져온다. 결혼한 아들네와 며느리 친정집까지 나누어 주고 싶은 마음이 담긴 넉넉함이다.
“여보, 무가 정말 실하네요.”
“가을에 텃밭에서 잘 자란 무를 땅에 묻어 두었어.
오늘 처음 꺼내 온 거야.”
단단하고 매끈한 무를 만지작거리며 무슨 요리를 할까 고민하다가, 남편이 좋아하는 동치미를 담그기로 했다. 문득, 어린 시절 어머니가 담가 주셨던 동치미의 맛이 떠올랐다.
어제는 첫눈이 내렸다. 요즘은 눈을 자주 볼 수 있지만, 어린 시절의 겨울과는 사뭇 다르다.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 꼭대기 세 번째 집, 그곳이 우리 집이었다. 눈이 오기 시작하면 봄이 될 때까지 녹지 않는 하얀 세상 속에서 겨울을 보냈다.
눈이 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따뜻한 방 안에서 군고구마를 구워 주셨다. 그리고 얼음이 동동 떠 있는 동치미 국물과 아삭한 무를 곁들여 주셨다. 그 맛은 입안을 얼얼하게 시리게 했지만, 동시에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 주었다.
가을이 오면 어머니는 김장 김치와 동치미를 담가 겨울 양식으로 준비하셨다. 텃밭에서 기른 무와 대파, 그리고 몇 가지 간단한 재료로 담근 동치미였지만, 그 맛은 다른 어떤 음식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마당 구석에 묻어 둔 항아리에서 퍼 올린 동치미 국물은 시골 땅과 어머니의 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동치미 하나 꺼내 오렴.”
어머니는 손에 투박한 바가지를 들려주셨다. 얼음이 살짝 얼어 있는 동치미 국물을 퍼 올릴 때마다 손끝이 시렸지만, 그 풍경과 맛은 겨울마다 반복된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결혼 후 남편은 어머니의 동치미를 참 좋아했다. 친정에 갈 때마다 어머니는 김치통에 동치미를 담아 손에 쥐여 주셨다.
“여보, 시골에서 먹을 때는 정말 맛있었는데, 우리 집에서 먹으니 그 맛이 덜하네.”
“맞아요. 항아리에서 바로 꺼내 먹던 그 맛은 아무리 해도 따라갈 수 없어요.”
어머니의 동치미는 단순히 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시간이었고, 가족을 향한 마음이었다. 나는 가끔 어머니의 동치미를 흉내 내보려 하지만, 그 맛을 온전히 재현하기란 쉽지 않다. 무와 대파를 심을 마당도, 어머니의 손길도 없는 내 동치미는 어딘가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번 겨울, 남편과 함께 먹을 동치미를 담갔다. 얼음이 동동 떠 있는 국물이 어머니의 손맛을 조금이라도 닮아 있기를 바라며.......
어머니의 손맛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시간과 추억, 그리고 사랑이었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그 따뜻하고도 시원한 동치미 한 그릇은 나의 어린 시절과 어머니의 정성스러운 손길을 그대로 담고 있다.
나는 오늘도 주문을 외워 본다.
“이번 동치미는 꼭 맛있어져라.”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을 닮아, 나도 언젠가 우리 아이들에게 추억 속 한 그릇을 만들어 줄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