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두려움
23살, 아직 철없는 나이에 임신을 했다. 축복일까, 걱정 한가득, 기쁨과 불안,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의 롤러코스터가 시작됐다.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지?"
부모가 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나는 기쁨보다 불안이 더 컸다. 뱃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건 놀랍고도 신비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막막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덜컥 부모가 된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산부인과 검진을 다녀오는 길에 책을 한 권, 두 권 사기 시작했다. 출산과 육아라는 미지의 세계를 하나씩 익혀 나가야 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배우면 할 수 있을 거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남편과 상의 끝에 출산 후 산후조리는 시골 친정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엄마가 계신 곳, 그곳이라면 조금은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출산 예정일을 사흘 앞두고 남편은 나를 친정에 데려다주고,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엄마와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은 작은방에서 자려했다.
그때였다.
"엄마, 뭐가 흐르는 느낌이야."
"애가 나오려나 보다. 양수가 터진 거 같아!"
시계를 보니 밤 11시.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몸보다 머리가 먼저 움직였다.
"엄마, 나 목욕부터 할게."
그때는 아기를 낳으면 손에 물을 묻히면 안 된다고들 했다. 입원하면 씻지도 못할 거라 생각해 머리를 감고, 따뜻한 물로 온몸을 씻었다. 마치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의식처럼. 그리고 아기 출산용품이 든 가방을 들고 차에 올랐다.
"엄마, 걱정 마. 병원 다녀올게요."
엄마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손을 꼭 잡아주셨다. 읍내에 들러 큰오빠 부부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한밤중의 도로는 적막했지만, 내 마음속은 수많은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 언니가 내손을 꼭 잡아주며 걱정 말라고 안심시켰다.
깜깜한 도로를 운전한 남편은 등에 땀이 흥건하게 적였다고 나중에 말해줬다.
산부인과에 도착해 비상벨을 누르니 간호사가 나왔다.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되었고, 시간 간격이 점점 짧아졌다. 10분, 7분, 5분…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온몸이 찢어질 듯 아팠다. 분만실로 이동하자 의사와 간호사가 배를 힘껏 눌렀다. 그리고 마침내….
새벽 6시 33분 아기가 태어났다.
순간, 배 속에 품고 있던 무게가 사라지며 몸이 가벼워졌다. 동시에 찾아온 시원한 해방감과 극심한 통증. 그러나 그 모든 걸 잊게 만드는, 갓 태어난 작은 생명이 내 품에 안겼다.
"내 아이구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출산 후 이틀을 병원에서 보내고 친정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아들의 첫 목욕을 시켜주며 땀을 뻘뻘 흘리셨다.
"엄마도 60이 넘으셨는데, 많이 힘드셨겠지…"
새벽부터 저녁까지, 하루 여섯 끼 미역국을 끓여주셨다.
"잘 먹어야 모유도 잘 나오고, 부기도 빨리 빠진다."
엄마는 늘 무거운 뚝배기에 미역국을 끓여 내오셨다. 국이 식지 않도록, 내 몸이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도록 나름의 방식이셨다.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저 받아먹기만 했다.
그때는 뭘 몰랐다. 그것이 엄마의 정성이었고 사랑이었다는 것을….
엄마의 정성은 끝이 없었다. 식사와 아기 목욕, 빨래까지 다 해주셨다. 마당 빨랫줄에 걸린 하얀 기저귀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던 5월의 어느 날. 따뜻한 햇살 아래, 나는 엄마의 사랑을 받으며 아기를 키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맙고 감사하며 가슴 한편이 저려온다.
처음 부모가 되는 일은 두렵고 막막했지만, 아기가 방긋 웃을 때마다, 첫걸음을 뗄 때마다, 옹알이를 할 때마다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내 아이는 자라고 있었고, 나 역시 엄마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엄마도 초보, 나도 초보. 완벽하지 않았지만, 사랑으로 키웠다.
그때 엄마가 내게 주신 사랑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이제 손녀를 바라보며 문득 생각한다.
"내 아들을 어떻게 키웠더라?"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의 사랑일 것이다.
아이는 부모를 키우고, 부모는 아이와 함께 성장한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자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