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딸의 고백
부모님의 가난만큼 안타까운 것이 없는데, 그들이 주는 사랑은 한 해 한 해 더 깊고 따뜻해지고 있다.
그래서 늙은 부모의 가난은 무척이나 슬프다.
어제저녁, 아이들을 데리러 엄마 동네로 향했다. 2박 3일간 외할머니댁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휴양'하고 온 아이들의 얼굴은 뽀얗고 포동포동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은 별 거 없지만 늘 대단하고 변함이 없다.
입이 심심할 무렵엔 시골에서 가져온 감자와 옥수수를 맛있게 쪄서 뜨겁지 않게 호호 불어 손에 쥐어 준다. 먹다 목이 메일 때쯤이면 어느새 아이들에게 물을 건네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 따뜻한 밥을 차려주고, 엄마인 나 몰래 치킨이나 라면 같은 야식의 기쁨을 선물한다.
아이들 손에 이끌려 동네 문방구며 인형 뽑기 가게를 돌아다니며 즐거워하고, 시장 구경도 시켜준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사온 직접 구운 재래김, 맛있는 떡들은 날 만나면 아이들이 제일 먼저 자랑하는 것들이다. 그 시장에서 사 먹은 칼국수가 그렇게 맛있다고, 큰 아이는 다음에 엄마도 꼭 같이 가자고 했다.
나의 엄마는 어김없이 반찬이며 김치, 정성스럽게 찐 옥수수를 담아 왔다. 비싼 식재료는 하나도 없지만, 나에겐 제일 귀하고 값진 음식들이다. 하나하나 손으로 다듬어 만든 나물 반찬, 아이들이 좋아하는 버섯볶음, 사위가 좋아하는 오이소박이. 나는 얼른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우리가 가면 늘 푸짐한 저녁을 차려주는 엄마께 오늘은 우리가 대접하고 싶었다. 아빠가 좋아하는 고깃집으로 가서 오랜만에 함께 외식을 했다.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 사이로 나는 힐끗힐끗 아빠, 엄마를 봤다. 소박하지만 정갈한 두 분의 옷차림이 눈에 띄었다.
두 분은 올해 말이면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나가야 한다.
두 분은 변두리에 아주 오래된 작은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데, 10년째 집이 쉽사리 팔리지 않고 있다. 부동산 활황기에 팔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아빠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게 기회가 지나가버렸다. 그때 나는 아빠가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몇 년 전 처음으로 아빠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실은 겁이 나더라고."
넉넉하지 못해도 늘 단단하고 강하다고 생각했던 아빠가 그런 마음이었다니, 나는 무척 놀랐다. 웃고 있는 얼굴 뒤에 견디는 마음이 있었다는 걸 그제야 슬쩍 알았던 것 같다.
딸 일하고 아이 키우는 것 도와주러, 우리 신혼집 근처로 두 분이 이사 오신 게 어느덧 10년 전이다.
그때만 해도 그렇게 집 값이 벌어지진 않았는데, 다 비슷비슷했던 집들이 저마다 자라는 속도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번 전세 만기 시점에도 더 가격이 떨어진 그 집은 팔리질 않고, 엄마 아빠가 갈 수 있는 집은 더 구하기 어려워졌다. 녹물이 나온다는 그 아파트로 다시 들어가 사시는 건 어떠냐고, 차마 나는 말할 수 없었다.
70이 넘어 아직도 집을 고민하고 있을 거라고 감히 저 두 분은 상상이나 했을까? 혹시 그 시작이 나로 인한 것은 아닐지 싶어 애틋하고 미안했다.
그럼에도 나의 부모는 씩씩하다.
구하기 어려울 뿐, 누구나 다 형편에 맞춰 사는 것이라고 했다. 전세 만기를 물어보는 딸, 사위의 질문에 답은 했지만 자식들이 쓸데없는 걱정을 할까 봐 아빠는 오늘도 전화해 나를 안심시킨다. 나중에 시간 되면 보러 갈만한 집들 한 번 같이 검색해 주면 너무 고마울 것 같다고 했다. 아니, 평생을 키워놓은 자식에게 고작 바라는 게 그것뿐인가?
자식에게 줄 생각은 하는데 받을 생각은 없는 나의 부모다. 그래서 감히 뭘 돕겠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두 분은 이번 겨울, 몇 년 전 그 겨울처럼 또 생각보다 좋은 집을 잘 구했다고 하실 것이다. 부모는 나에게 바란 적도 없지만, 이럴 땐 내가 돈을 엄청 잘 벌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이 든다.
넉넉하지 않아도 평생 큰 사랑을 주는 나의 부모님.
난 나의 부모님이 가장 부자라는 걸 알면서도, 문득 애틋하고 애틋하다.
그래서 늙은 부모의 가난이 슬프다.
고기를 굽던 나는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