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필코 마셔야 하는 밤
기필코 맥주를 마셔야겠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랬다. 집에 있으면 유독 엄마를 많이 찾는 둘째, 오늘은 그 둘째가 아주 한가한 날이었다. 4시에 영어학원 가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는 날이다.
아이에게는 최고의 날, 나에게는 일명 '빡센' 그런 날이다.
날이 좋으면 밖에 나가 친구들과 놀 텐데, 요즘 같은 무더위에는 아이들도 나가 노는 것을 포기한다. 아이들이 나가 노는 것을 꺾다니, 지구 온난화가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하는 여름이다.
아이는 어제부터 배가 아프다고 했다. 병원에서 장염을 진단받았다. 다행히 열은 금세 잡혀 겉으로 보기에 아이의 컨디션은 매우 좋아 보였다. 다만 간간히 배가 아픈 순간들이 있었다. 먹는 걸 조금만 조심하며 오늘 하루 잘 쉬면 괜찮을 것 같았다.
환자라고 할 수 없지만 환자인 아들과 보내는 하루였다. 집에서 뒹굴뒹굴하는 아이는 참 행복해 보였다. 얼마나 효자인지, 엄마가 '혹시나' 지루할까 봐 틈만 나면 나를 불러댔다. 엄마, 엄마 소리에 정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컨디션이 좋은 게 어디냐 싶었다.
아이는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신이 나 스펀지 공을 침대에 던지며 놀기까지 했다. 놀만큼 놀았으니 숙제를 좀 해보라고 했다.
"이거 아웃 하나만 잡고!"
야구광인 아들은 혼자 스트라이크 존과 싸우고 있었나 보다.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숙제를 했는데 엄청난 속도였다. 다 했단다. 슬슬 내 속에서 무언가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간신히 꿀꺽 삼켰다. 정말 다 했냐고 조금 더 하라고 얘기했는데 신기하게 이럴 때 배가 갑자기 아픈가 보다.
"엄마, 갑자기 배가 좀 아파!"
그렇게 오늘 작은 아이의 배는 아팠다, 아팠다 안 아팠다를 종일 반복했고 그 타이밍도 참 기가 막혔다. 그 사이 내 속에서는 뭐가 자꾸 올라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알 리가 없는 둘째는 그 와중에도 쉼 없이 나를 불렀다. 하고 싶은 말도 많고 요구사항도 많은 아이가 학원 갈 시간은 대체 언제 오는 건지!! 누가 날 좀 구해줬으면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구세주는 없었다.
그럼에도 인간 승리다! 4시는 왔고 아이는 떠났다.
학원이 끝날 때 배가 아프면 엄마를 부를 수도 있단다. '오늘처럼 아플 때는 엄마가 와줄 수 있지?'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은 해방이다! 소파에 걸터앉아 한숨을 돌리는데 현관문 소리가 들렸다.
설마...
작은 아이가 가고 큰 아이가 왔다. 배가 고프다고 했다. 점심을 안 먹어서 배가 너무 고프다고 밥을 좀 달라고 했다. 하필 이런 날 밥도 없고 그 맨날 있던 라면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밥을 해 한 상 차려주니 이제 둘째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다시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빨래 한 번 돌리니 11시가 훌쩍 넘었다. 야구 보면서 멀쩡했던 배가 내가 설거지를 마치니 다시 아프다고, 엄마 손은 약손을 해달라며 실실 웃던 아들도 잠들었다.
딱히 뭐 대단한 것도 없는데 종일 쉴 틈이 없었고, 속에서 올라오는 것들을 꾹꾹 다시 삼켜 넘긴 하루였다. 남편이 만약 나에게 오늘 뭐 했냐고 물어보면 그냥 집에 있었다고 할 하루인데, 나는 도저히 이대로 잘 수가 없다.
졸리지만 두고 봐라! 기필코 맥주를 마시고야 만다!
맥주가 약이 되는 날, 오늘이 그날이다. 하루 종일 속에서 오르락내리락했던 그걸, 맥주로 좀 뻥 뚫어줘야 한다. 냉장고에 있던 캔 하나를 꺼내 냉동실로 옮겼다.
일기처럼 매일 편안히 내 마음을 글로 적어보자 마음먹으니 아이들 방학이 왔고, 방학이어도 쓸 수 있는 시간을 찾아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며 나는 브런치에 글을 남기고 있다.(향인 작가님께서 댓글에 남겨주신 표현인데 무척 와닿는다.)
그런데 오늘 밤은 뭘 생각할 틈도 없이 작은 아들과 맥주 생각뿐이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내 글까지 따라왔다. 너 오늘 좀 대단하다.
그래서 오늘은 맥주가 '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