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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대신 남긴 것

사춘기를 앞둔 아이과 함께 하며

by 크런치바

'사진과 마음'


월화수목금 매일 이곳에 일기를 남겨보기로 했는데 어제는 그 약속을 못 지켰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럴 줄 알았다. 일기를 못썼다며 마음 한편이 찝찝했지만, 결국 나는 감기는 눈을 이길 수가 없었다.


오늘 그래서 잠깐 틈이 생긴 사이 부지런히 노트북 앞에 앉았다. 스스로와의 약속은 못 지켰지만, 그래도 어제 하루 잘 보냈다는 생각이 든다. 글 대신 사진과 마음을 남겼다고 생각이 들어서다.


아이들 방학이 이제 일주일 남았다. 방학이면 나는 아이들과 꼭 갖는 시간이 있다. 아이들 학원이 없고 나도 수업이 없는 평일에 셋이 외출하는 것이다. 그래도 방학인데, 아이들에게 평소와는 다른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어서다. 대단한 것은 아니어도 평일에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찾아 방학 중 하루 셋이 놀러 가는 날을 갖는다. 어제가 바로 그날이었다.


어제는 아침 9시가 넘어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뭐 하고 놀까 궁리하다 우연히 sns 광고에 등장한 서울 시티투어 2층 버스를 발견했는데, '이거다!' 싶었다. 자기 전에 예약하고 아침 일찍 출발했다.


홍대나 인사동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오늘도 거리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 사 먹을 것을 예상했다고 했다. 깜짝 선물처럼 '2층 버스' 얘기를 듣고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다. 그렇게 설레서 탔던 2층 버스 투어가 우리는 기대보다 더 좋았다.


"아무리 더워도 우린 무조건 2층이지!!"


더위에 타들어가도 낭만이 좋은 우리 셋은 이런 쿵짝이 잘 맞는다.


자주 다니던 서울 시내를 오픈된 2층 버스를 타고 다니니 이건 또 신세계였다. 재미는 물론 해방감도 어마어마했다.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 더운 줄도 몰랐다. 광화문이며 남대문, 서울역, 청와대 곳곳을 다니며 아이들과 수도 없이 눈이 마주쳤다. 그때마다 서로 절로 웃었다.


좋아하는 통인 시장에 들러 아이들이 평소 좋아했던 닭꼬치도 사 먹고, 인사동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며 오늘을 기억할 작은 기념품도 샀다. 툭하면 오는 인사동인데 아이들은 '농구공 물통'을 들고서는 오늘 이 나들이를 추억하기 위해 꼭 샀으면 좋겠다고 했다. 뻔한 설득에 넘어가는 줄 알면서도, 인사동에서 인사동과 아무 상관도 없는 물통을 사줬다. "좋단다!" 신난 아이들을 보니 그럼 됐다 싶었다.


점심도 먹고, 청계천으로 넘어가서 작은 전시도 보고, 아이들이 원하는 사진도 열심히 찍어줬다. 남자아이들 둘이 모이면 평범한 사진이란 없다. 눈은 감고 혀는 내밀고 온갖 것을 다 하고는 서로 사진을 보며 잘 나왔다고 얘기도 한다. 난 그런 즈그들의 세상 사진을 열심히 찍어주고 간간히 우리 셋 사진도 부지런히 남겼다.


아이들은 오늘 우리가 10000 걸음 넘게 걸었다고 신나 했다. 어쩐지 나 다리가 후들거리더라. 집에 갈 시간이다!


6시에 돌아와 간신히 저녁 일정들을 소화하고 아이들 옆에 누웠는데 눈이 감겨 더는 뭘 할 수가 없었다. 뙤약볕에 40대 아줌마 체력을 다 쓰고 돌아온 것이 몸소 느껴졌다.


그리고는 레드썬, 다음이 기억나질 않는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오늘 아침 아이들이 사진을 꺼내보며 좋아하는 걸 보니 뿌듯했다. 사진 속 나도 계속 웃고 있었다. 아이들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 나갔지만, 결국은 내 추억이고 우리의 추억이다.


사춘기가 다가오고 있는 큰 아이가 따라나선 게 고맙다는 생각도 했다. 언젠가 우리가 보낸 이런 날들이 그리울지도 모르겠지? 인사동과 아무 상관없는 저 농구공 물통이 진짜 보물 같은 추억 덩어리가 될 수도 있겠다.


사춘기를 앞둔 아들 덕에 자꾸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어제가 무척 신나서, 그 버스는 못 잊을 거라는 아이 말이 좋았다. 어제 일기는 못 남겼지만, 그래도 대신 우리의 시간을 사진과 마음에 담아 남겼다.


그랬으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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