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생명의 무게를 잘 몰랐다. 우울에 빠질 때는 '죽고싶다'고 생각하고, 나를 특히 화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 습관이 잘못된 것을 알았음에도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원래 그렇게 살던 사람으로 여기며, 고칠 수 없을 거라고 여겼다.
작은 외삼촌은 나와 겨우 17살 밖에 차이나지 않아 삼촌이 아니라 사촌 오빠같이 친하게 지냈다. 성인이 된 이후부터는 삼촌과 외숙모, 나 셋이서 종종 술자리를 가지기도 했다. 삼촌은 내가 필요한 것을 굳이 말 하지 않아도 가끔 선물로 주기도 하고, 나는 삼촌의 아이들(내 사촌동생들)과 자주 놀았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어머니께서 "무슨 소리야, 누가 죽어."라고 하시는 걸 들었다. 나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한참을 한숨만 쉬셨다. 삼촌에게 심장마비가 왔다는 소식이었다. 나와 부모님은 곧장 삼촌이 입원한 응급실로 향했다. 하지만 출입 가능한 보호자의 인원이 한정되어있어 어머니만 들어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응급실에서, 아버지와 나는 집에서 하루를 보냈다.
다음 날 아침이 됐다. 전화를 받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두웠다. 삼촌이 투석을 받고 있고, 투석을 받다가 의식이 돌아와야 수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나와 아버지는 일어나자마자 삼촌이 있는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 도착하고 어른들의 얼굴을 보니 삼촌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 품에 안겨 울었다.
사촌동생들은 죽음을 잘 이해하지 못 하는 나이었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아빠가 조금 많이 아파서, 먼저 하늘나라로 가서 너희들을 기다리고 계시겠대."라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살아있는 동안 아버지를 영영 볼 수 없다는 것을 돌려 말 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말을 전하면서 나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눈물을 참아야했다. 그리고 내 마음도, 참아야했다.
어른들은 장례식장을 지켜야하고, 외할머니께서는 쓰러지셨고, 아이들은 밖에 돌아다니지 않게 해야하니, 내가 할머니와 아이들을 맡았다. 심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였지만, 어른들 또한 지쳐있어서 내 상태를 돌아봐 줄 여력이 안 됐다. 3일을 몰래 울었더니 눈이 많이 붓고 틈만 나면 숨이 찼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채로 삼촌의 장례식이 끝났다.
어머니를 비롯한 외가 식구들은 식음을 전폐했다. 어머니께서 식사를 하지 않으시니 나도 마음 편히 밥을 먹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몇 숟갈 뜨고 나면 금새 입맛이 없어졌다. 며칠 간 침울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지나 내가 갑상선암 수술을 해야할 날이 왔다.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상선암은 (다른 암도 마찬가지일 것 같지만) 전이가 되었는지 열어봐야 안다고 한다. 며칠 전 삼촌의 죽음을 겪었으니, 정말 죽고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적어도 지금 죽어서는 안 됐다. 이전에 다음 날 내가 죽어있게 해달라고 생각하다 잔 적은 있지만, 이런 생각을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제발 죽지 않게 해주세요.'
죽음은 종교가 없는 사람도 간절히 기도하도록 만든다는 걸 그 때 깨달았다. 죽음 자체가 무섭다기보다 죽음으로 인해 주변인들이 겪는 슬픔의 무게가 이다지도 무거울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후 나는 나 혹은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생명'을 인질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죽음이 남기고 간 자리가 얼마나 허전하면서 무거운지 알게 되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