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감을 견디지 못해 심한 자책으로 내 마음을 멍들게 하던 나날들에 나에게 더욱 큰 절망을 안겨주었던 문구들은 다름아닌 이런 것들이었다. 남들은 쉽게 행복을 찾는건가 싶어지다가도, 내가 행복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태어났구나 싶어져서. 나는 지금까지, 앞으로도 평생 행복이라는 감정이 무엇이고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갈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남은 삶들에 일찍 질려버려서 생명과 삶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나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할 사람들을 생각하는 일을 제외하고는)죽음이 두렵지 않았고, 살아온 날들과 벌어질 일들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없었다. 살아지니까, 그래서 살 뿐이었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행복하느냐'고 물어보면 한참을 고민했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했을 때 돌아올 당혹스럽다는 반응이 두려워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로 답했다. 태어나길 거짓말에는 재능이 없어서 마음속 한 구석에 응어리진 것이 얼굴로 드러나긴 했지만.
인생의 반 넘는 시간, 아니 사실 거의 전부를 그렇게 지냈던 내가 이제는 남이 묻기도 전에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됐다. 게다가 나를 사랑하게 됐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도 있었다. 정확히 어느 시점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남들보다 나를 더 생각하기 시작한 그 시점 쯤에 삶에 아쉬움을 발견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당시 그리던 인스타툰의 주제를 '갑상선암 환자의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방법'으로 바꾸었다. 과거의 나처럼 일평생을 불행하게 살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사람들에게, 당신들도 바뀔 수 있다고 희망을 주고 싶었다. 말 뿐인 위로가 아니라 정확히 내가 그러기까지 어떤 행동을 해왔는지를 적었다. 모아놓고보니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변화를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그 기대 때문인지 덕분인지, 인스타툰을 1년 간 연재하면서, 가장 마음을 울렸던 댓글은 "오늘 힘들었는데 임노(나의 활동명)님 덕분에 다시 용기가 나요."와 같은, 나로 인해 일상을 살아갈 기력을 찾은 사람들이 남긴 것들이었다.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불행을 자주 느끼고, 행복을 늦게 깨달았던 것은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첫째로서의 책임감과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에 대한 아쉬움, 이를테면 10년을 넘게 배웠던 중국어를 반드시 활용해야한다는 어떤 압박감 같은 것들, 그리고 행복해야한다는 강박. 이런 것들이 나를 오히려 행복에 다가서기 어렵게 만들었다.
'행복해야지.'보다는 '이 정도면 괜찮네.'를 더 자주 생각했으면 좋겠다. 행복을 강요하는 순간 더이상 그것은 행복이 될 수 없다. 행복하지 못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은 계속해서 행복을 재단하게 만들고, 거창한 것을 행복으로 만든다. 그리고 남들에게 보여지는 행복에 치중하게 된다. 그러니 '이 정도면 괜찮은' 것들을 많이 만들어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아보길. 그럭저럭 괜찮은 삶은 꽤 괜찮은 하루를 만들고, 꽤 괜찮은 하루가 쌓이면 꽤 괜찮은 내가 되고, 어느 순간 스스로를 사랑스럽다고 느낄 시점이 올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