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창자 밑에 쓴 물까지 다 올라오고 있었지만 3일 전 새로 들어온 혈액암 환자에게 이곳 요양병원에서는 괜찮은지 묻는 거 외엔 그 어떤 처방도 해주질 못했다.
암 진단을 받고 제일 처음 한 일이 최고급 요양병원을 알아본 거였다.
아빠의 8년 투병으로 동생과 엄마가 한 고생을 알고 있기에 나의 똥고집이 내린 결정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설 좋은 요양병원에서 가족들에게 피해 안 주고 씩씩하게 이겨내겠다는 의지가 불탔었다. 그래서 1차 항암을 받은 다음날 퇴원해서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리 예약해 둔 요양병원으로 입원을 했다. 하지만 4일 만에 강했던 나의 의지는 무너졌다. 항암 한 번에 잔뜩 겁먹은 초라한 쫄보가 되어 새벽에 나 좀 데려가 달라며 울며 전화를 했고 그날로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 때도 고생한 동생한테 미안하고 스님머리를 엄마한테 보이는 것도 속상했지만 다른 걸 생각할 여유 따윈 없었다.
병원도 나의 퇴원을 반기며 신속하게 처리해 줬다. 우선 나와 같은 혈액암 환자에게 요양병원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고가의 치료 장비와 주사를 써야 요양병원도 수입이 되고 환자도 항암을 좀 더 수월하게 버틸 수 있는 건데 고형암 위주로 준비된 장비와 주사들은 의사들조차 혈액암 환자에겐 쉽게 처방하지 못했다.
그러니 호텔 출신의 영양사가 차려주는 최고의 밥상이 있다해도 항암 부작용으로 음식을 전혀 못 넘기는 나에게는 그곳이 바로 지옥이 되었다. 물만 넘겨도 구역질이 올라왔고, 항암 다음날 맞는 백혈구 촉진제는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뼈통증을 불러왔다. 절로 눈물이 났다.
항암은 암세포만 죽이는 게 아니다.
항암은 정상세포도 모조리 죽인다. 항암 후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서 정상세포들은 신기하게 다시 살아나고 독한 항암제도 어느 정도 내 몸에서 빠져나간다. 그러면 1주 정도는 살만해진다. 그렇게 3주 간격으로 남아있을 암세포들과 함께 간신히 살아난 정상세포들까지 몽조리 독한 항암제로 죽여버리기를 수차례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항암 후 정상세포가 살아나기까지 나의 몸은 다시는 세상에 설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으로 가라앉았다. 온몸에 털이란 털은 몽조리 빠지고 바짝 메마른 몸과 얼굴은 나의 마음까지 무너뜨렸다.
항암제의 독성은 팔에 맞으면 괴사가 생길 수 있어서 쇄골 아래 중심정맥에 케모포트를 박아서 주사를 맞는다. 그러다 보니 목으로 계속 화학실 알코올 냄새가 넘어온다. 그건 생각보다 너무 괴로운 일이었다. 또 횟수가 쌓이면서 그 냄새는 살냄새가 되고 나의 숨에 배어 나왔다.
내가 암환자가 되기 전에는 항암 하면서 영양실조로 결국 병한테 지는 사람들을 보며 살려는 의지가 약한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자기가 겪지 않은 일을 판단한다는 게 얼마나 오만한 건지... 어느 드라마에 나온 ‘체력이 보호하지 않는 정신력은 구호에 불과하다’라는 말이 절절하게 실감 났다.
모든 게 정신력 이라며 그동안 수없이 많은 것들에 궤변을 늘어놓았던 나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워졌다. 암진단을 받자마자 나는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너무 공포스럽기까지 했었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너무나 당연한 불변의 법칙 앞에 갑자기 나 혼자만 껑충 다가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누구나 막연하게 언젠가는 나도 죽겠지란 생각을 하는 것과 진짜로 내가 곧 죽을 수도 있는 일이 내 앞에 벌어진 건 너무나 다른 일이었다. 하지만 항암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항암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건 어쩌면 삶에 대한 애착을 좀 내려놓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조금은 줄여주기 위해서란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전이가 된걸수도 있습니다
6번의 항암을 기간 내에 완주하고 컨디션이 좋지는 않았지만 곧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설렘으로 최종 검진날을 기다리고 있을 때 오른쪽 엉덩이의 통증이 시작됐다. 처음엔 담이 결린 거 같았지만 곧 발을 내디딜 수 없는 통증에 다시 난 쫄보가 되었다.
급하게 응급실로 들어가 찍은 CT를 본 의사는 전이일 수도 있다면서 MRA를 찍자 했다. 그리고 다음날 검사 결과를 듣기 전까지 나는 또다시 항암을 시작하라 한다면 못 받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만큼 항암의 고통은 죽음의 공포를 누를 수도 있었다.
다행히 결과는 “전이로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게 너무 약해져 있다 보니 디스크가 터져서 아픈 거 같다”였다. 디스크 시술을 받고 최종 검사 때 PET CT의 결과도 좋았지만 의사는 다지기 항암이라며 두 번을 더 받자했다. 그 말을 듣고 난 속이 울렁거리고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다지기란 의사의 말은 꽤나 달콤한 유혹이 되어 바닥나 있던 의지를 끌어냈다.
그렇게 난 8번의 항암이란 독한 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내 몸에 허락 없이 쳐들어와 자리 잡은 암세포들을 몰아내고 승리할 수 있었다. 남자들의 영웅담 속에 17 대 1로 싸워서 이긴 승리랑은 쨉이 안되는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