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born 민주 Apr 12. 2023

세상에 내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란 없다

화장실에서 구역질과 심한 복통으로 밤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창자 밑에 쓴 물까지 다 올라오고 있었지만 3일 전 새로 들어온 혈액암 환자에게 이곳 요양병원에서는 괜찮은지 묻는 거 외엔 그 어떤 처방도 해주질 못했다.

암 진단을 받고 제일 처음 한 일이 최고급 요양병원을 알아본 거였다.

아빠의 8년 투병으로 동생과 엄마가 한 고생을 알고 있기에 나의 똥고집이 내린 결정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설 좋은 요양병원에서 가족들에게 피해 안 주고 씩씩하게 이겨내겠다는 의지가 불탔었다. 그래서 1차 항암을 받은 다음날 퇴원해서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리 예약해 둔 요양병원으로 입원을 했다. 하지만 4일 만에 강했던 나의 의지는 무너졌다. 항암 한 번에 잔뜩 겁먹은 초라한 쫄보가 되어 새벽에 나 좀 데려가 달라며 울며 전화를 했고 그날로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 때도 고생한 동생한테 미안하고 스님머리를 엄마한테 보이는 것도 속상했지만 다른 걸 생각할 여유 따윈 없었다.


병원도 나의 퇴원을 반기며 신속하게 처리해 줬다. 우선 나와 같은 혈액암 환자에게 요양병원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고가의 치료 장비와 주사를 써야 요양병원도 수입이 되고 환자도 항암을 좀 더 수월하게 버틸 수 있는 건데 고형암 위주로 준비된 장비와 주사들은 의사들조차 혈액암 환자에겐 쉽게 처방하지 못했다.


그러니 호텔 출신의 영양사가 차려주는 최고의 밥상이 있다해도 항암 부작용으로 음식을 전혀 못 넘기는 나에게는 그곳이 바로 지옥이 되었다. 물만 넘겨도 구역질이 올라왔고, 항암 다음날 맞는 백혈구 촉진제는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뼈통증을 불러왔다. 절로 눈물이 났다.




항암은 암세포만 죽이는 게 아니다.


항암은 정상세포도 모조리 죽인다. 항암 후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서 정상세포들은 신기하게 다시 살아나고 독한 항암제도 어느 정도 내 몸에서 빠져나간다. 그러면 1주 정도는 살만해진다. 그렇게 3주 간격으로 남아있을 암세포들과 함께 간신히 살아난 정상세포들까지 몽조리 독한 항암제로 죽여버리기를 수차례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항암 후 정상세포가 살아나기까지 나의 몸은 다시는 세상에 설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으로 가라앉았다. 온몸에 털이란 털은 몽조리 빠지고 바짝 메마른 몸과 얼굴은 나의 마음까지 무너뜨렸다.


항암제의 독성은 팔에 맞으면 괴사가 생길 수 있어서 쇄골 아래 중심정맥에 케모포트를 박아서 주사를 맞는다. 그러다 보니 목으로 계속 화학실 알코올 냄새가 넘어온다. 그건 생각보다 너무 괴로운 일이었다. 또 횟수가 쌓이면서 그 냄새는 살냄새가 되고 나의 숨에 배어 나왔다.


내가 암환자가 되기 전에는 항암 하면서 영양실조로 결국 병한테 지는 사람들을 보며 살려는 의지가 약한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자기가 겪지 않은 일을 판단한다는 게 얼마나 오만한 건지... 어느 드라마에 나온 ‘체력이 보호하지 않는 정신력은 구호에 불과하다’라는 말이 절절하게 실감 났다.


모든 게 정신력 이라며 그동안 수없이 많은 것들에 궤변을 늘어놓았던 나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워졌다. 암진단을 받자마자 나는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너무 공포스럽기까지 했었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너무나 당연한 불변의 법칙 앞에 갑자기 나 혼자만 껑충 다가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누구나 막연하게 언젠가는 나도 죽겠지란 생각을 하는 것과 진짜로 내가 곧 죽을 수도 있는 일이 내 앞에 벌어진 건 너무나 다른 일이었다. 하지만 항암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항암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건 어쩌면 삶에 대한 애착을 좀 내려놓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조금은 줄여주기 위해서란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전이가 된걸수도 있습니다


6번의 항암을 기간 내에 완주하고 컨디션이 좋지는 않았지만 곧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설렘으로 최종 검진날을 기다리고 있을 때 오른쪽 엉덩이의 통증이 시작됐다. 처음엔 담이 결린 거 같았지만 곧 발을 내디딜 수 없는 통증에 다시 난 쫄보가 되었다.


급하게 응급실로 들어가 찍은 CT를 본 의사는 전이일 수도 있다면서 MRA를 찍자 했다. 그리고 다음날 검사 결과를 듣기 전까지 나는 또다시 항암을 시작하라 한다면 못 받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만큼 항암의 고통은 죽음의 공포를 누를 수도 있었다.


다행히 결과는 “전이로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게 너무 약해져 있다 보니 디스크가 터져서 아픈 거 같다”였다. 디스크 시술을 받고 최종 검사 때 PET CT의 결과도 좋았지만 의사는 다지기 항암이라며 두 번을 더 받자했다. 그 말을 듣고 난 속이 울렁거리고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다지기란 의사의 말은 꽤나 달콤한 유혹이 되어 바닥나 있던 의지를 끌어냈다.


그렇게 난 8번의 항암이란 독한 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내 몸에 허락 없이 쳐들어와 자리 잡은 암세포들을 몰아내고 승리할 수 있었다. 남자들의 영웅담 속에 17 대 1로 싸워서 이긴 승리랑은 쨉이 안되는 승리였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李玟注(이민주)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